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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제천 청풍문화재단지①--왕비 둘 배출한 청풍 김씨들의 고향
[헤럴드경제=제천]우리 역사상 최고의 ‘면접 여왕’은 누굴까. 조선왕비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꼽아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명성왕후는 조선 제18대 임금 현종의 비(妃).로 숙종의 어머니다. 청풍(淸風) 김씨(金氏) 집안 출신.

그가 ‘면접’에서 보여준 ‘모범답안’은 조선시대 유교적인 사상이 가장 투철했던 표본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청풍 하면 청풍 김씨를 빼고 얘기할 수 없다. 그래서 명성왕후가 세자빈으로 간택될 때의 이야기가 이곳 청풍에서 자랑스럽게 전해오고 있다. 명성왕후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본관이 청풍이기에 이 지역에서도 자부심이 대단하다.

청풍문화재단지. 역사 속으로의 여행 출발점이다. 앞쪽은 매표소, 먼쪽은 입구인 팔영루다.

그가 간택될 때의 일화가 재밌다. 하루는 어머니가 선몽을 꿨는데, 조상이 나타나 “내일 찾아오는 손님을 극진히 모셔라” 하고 사라졌다. 다음날 아무리 기다려도 손님이 오지않자 지친 어머니 대신 딸(명성왕후)이 이어받았다. 이윽고 저녁 무렵 허름한 차림의 선비가 들어와 “하룻밤 묵어갈 수 없느냐”고 하자 안으로 안내하고 저녁밥을 지어 올렸다.

처자는 저 선비가 누군지 몹시 궁금했다. 그렇지만 감히 처자가 남정네에게 함부로 말을 많이 건넬 수도 없었던 당시, 밥상으로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해냈다. 밥에 뉘(도정안된 볍씨)를 소복히 얹어 상에 올렸다. 선비는 한 두 개도 아니고 굳이 15개나 올린 이유를 골똘히 생각해봤다. 15개의 뉘를 골라내며 이게 무슨 의미일까 헤아리다 ‘뉘, 뉘, 뉘…시오(15),시오,시오…’ ‘뉘시오…’. “아, 나에게 ‘뉘시오’라고 묻는구나” 하고 알아채고는 대답으로 생선 반찬을 네 토막 내어 되돌려 줬다. 이 처자는 고기(魚)가 네(四)토막, 금세 어사(御史)임을 알아챘다고 한다. 그만큼 남달리 총명했던 처자였다.

당시 궁궐에서 세자빈 간택령이 떨어진 시점이라 대상자를 수소문하던 이 선비가 이 청풍 김씨 처자를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소위 궁궐에서의 ‘면접’은 엄격했다. 제일 먼저 구중궁궐 기와장이 모두 몇 개인지 세어보라는 질문. 모든 여식들이 지붕마다 올려다 보며 손가락으로 세고 있을 때 이 청풍 김씨 처자는 추녀 끝 낙숫물 떨어진 자국을 세어가더니 답을 맞히는 기발함을 보였다고 한다.

다음 관문, 8명의 후보가 각자 친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방석 8개에 각각 앉아서 ‘면접’을 보는데 이 청풍 김씨 처자만 앉질 않고 서 있었다. ‘왜 앉질 않느냐’는 질문에 “제가 어찌 감히 제 아버님 이름이 적힌 방석에 덜썩 앉을 수가 있겠습니까”라며 앉기를 거부했고 이 과정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최종 간택됐다고 한다.

청풍(淸風),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으로의 여행을 떠났다. 이는 곧 ‘역사 속으로의 여행’이다. 조상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여있는 청풍문화재단지가 그 여행지로 ‘제천관광 1번지’다.

청풍문화재단지에서 본 청풍호, 청풍대교와 아름다운 금수산 능선들.

유별남을 보여줬던 청풍 김씨 가문의 흔적이 살아숨쉬는 고장이기도 하다. 충주댐이 생기면서 자손대대 이어오던 삶의 터전을 물 속에 헌납해야 했고 수몰 과정에서 그들이 일궈온 각종 생활상들을 복원 조성해 놓은 곳이 바로 청풍문화재단지다. 보존가치가 있는 고가(古家) 4채, 국가지정 보물도 2개나 있다. 이외에도 행정업무를 보던 관아, 객사, 누각, 산성, 고인돌, 지석묘, 향교 등 유물들이 즐비하다. 새삼스레 보고 느낄 소재가 너무나 많다. 바로 옆 빙 둘러 확 트인 수려한 청풍호는 보너스다.

필자는 이번이 두번째 제천 방문이다. 박달재를 찾았을 때 함께 했던 심상일 주사님과 황금자 선생님이 함께 동무를 해줬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라 조금이라도 더 지식을 빼내오는게 필자의 ‘임무’였다.

입구 팔영루(八詠樓)를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언덕 위에 3채의 한옥이 나란히 나온다. ‘ㅡ’자형, ‘ㄷ’자형, ‘ㄱ’자형이다. 이 중 가운데 있는 ‘ㄷ’자형 한옥이 청풍 김씨가 살았던 한옥이다. 오래된 나무 문패에 ‘金成基(김성기)’라고 적혀있다.

세련된 도시민 시각으로 얼핏 겉만 보면 낡아빠진 한옥이 시시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치더라도 5분, 10분만 시간 내서 관심 가져보자. ‘한옥의 위대한 과학’을 공부하게 될 테니까. 필자는 이 ‘ㄷ’자 집과 옆의 ‘ㄱ’자 집에 집중 머물며 둘러봤다.

먼저 집 구조를 봤다. 의외로 재밌었다. 이 청풍 김씨의 ‘ㄷ’자 집이다.

사립문을 들어서면 입구쪽 좌우에 각각 부엌이 있다. 무슨 자그마한 옛날 한옥에 부엌이 두 개나 있을까. 다 이유가 있었다.


청풍 김씨가 살았던 조선시대 한옥. ‘ㄷ’자 구조로 좌우 앞쪽에 각각 부엌이 있다. 오른쪽 사진은 집 기둥에 부착된 문패. 한자로 ‘김성기’라고 적혀있다.

옛날 부엌이 두 개, 세 개인 집은 주로 3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첫째, 출퇴근하는 외거노비와 함께 사는 솔거노비들에게 부엌을 내주는 경우, 둘째 3대 또는 4대 대가족이 살 경우 며느리에게 따로 부엌을 내주는 경우, 그리고 셋째로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정네가 원래 부인 외에 작은 부인을 두고 살기도 했는데 별도의 부엌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라는 것. 그러니 부엌이 두 개 이상이면 주로 이 셋 중 하나의 이유 때문으로 보면 된다. 당연히 경제력이 있는 집안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안방과 사랑방이 있어 더 정겨운 한옥. 안방은 안방마님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좀 더 보안이 필요한 곳이다. 그럼 마루를 사이에 두고 똑같아 보이는 여러 개의 방 중 안방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손님이 와서 안방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방법은 머름이 있는 방, 즉 문지방이 높은 방을 찾으면 된다. 다른 방은 문지방이 없거나 아주 낮지만 안방 만큼은 높게 만들었는데 그것도 다 이유가 있다. 밖에서 갑작스레 손님이 와 문을 열어 내다볼 때 앉아있는 안주인의 옷매무새나 흐트러진 모습을 일정부분 이 머름으로 가릴 수 있기 때문이란 것. 듣고보면 이렇게까지 섬세한 배려가 숨어있었나 싶다.

‘ㄴ’자 한옥, 안방임을 알려주는 머름, 부엌의 모습, 한옥의 본채와 머슴이 살던 바깥채의 모습.(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한옥 탐방에서는 특히 장독대를 관심있게 보자. 장독대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과학’이다.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체험할 수 있는 무대다. 우선 장독대는 바닥에 자갈을 많이 깔아두는데 이는 빗물 배수 기능과 장을 담궜을 때 자갈이 햇볕에 달궈져서 장의 숙성을 돕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봐왔던 장독대 자갈에 그런 과학이 숨어있을 줄이야.

장독대 주변에는 또 반드시 앵두나무라든가 모과나무, 살구나무, 감나무 등 과실수가 있는데 이는 그냥 보기좋으라고만 심은게 아니라 봄철 장독대 뚜껑을 열어두면 꽃가루가 들어가서 장 맛을 깊게 하고 숙성시켜 준다는 게 우리 조상들의 지혜다. 먹는 음식까지도 자연과 더불어 맛을 빚었다. 장독대의 갯수를 보면 물론 그 집의 식솔의 규모를 알 수도 있다. 

장독대는 과학이다. 바닥의 돌과 유실수들은 철저히 계산된 아이템들이다.

한옥 측면의 넓은 뜰은 대부분 ‘여인을 위한 공간’이다. 조선시대에 여인들은 되도록 앞쪽 마당 보다는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옆 뜰에서 바깥 바람을 쐬곤 했다. 필자가 들렀던 ‘ㄴ’자 집의 옆 뜰은 그래서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목련나무도 한 그루 있었다. 마치 지금 내 눈 앞에 긴 머리 땋은 아리따운 낭자가 한복을 곱게 입고 모란꽃나무 아래에서 거니는 모습이 아련거리는 듯 했다. 오늘날 아파트에 사는 필자의 모습이 마치 ‘닭장’ 생활 처럼 대비되는 느낌이다.

한옥의 경우 집 옆이나 뒤쪽에 가느다란 대나무숲을 가꾸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철저히 ‘계산된’ 조림이다. 촘촘한 대나무숲은 방풍림 역할과 화재시 불의 확산을 막는 방화림 구실을 한다. 게다가 한옥 자체가 방음이 안되는 집인지라 옛날에는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막아주는 방음림 기능까지 한다는 것. 알고 보니 참으로 놀랍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순간 요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가 문득 오버랩됐다. 옛날에는 이웃간의 갈등요소도 ‘자연(自然)’이 자연스레 해결해준 셈이다.

집의 뒤뜰과 이웃집 또는 마을길의 방음, 방풍, 방화 기능을 하는 대나무숲 울타리.

청풍문화재단지가 단순한 옛 얘기를 모아둔 공간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과 감성을 심어주는 명소로 다가왔다.

(내용 ②편에 계속)
………………………
■ 청풍 김씨 시조 : 청풍 하면 우선 청풍 김씨다. 왕비 둘을 배출하고 8정승이 나온 명문가문이다.

왕비로는 명성왕후(明聖王后)와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있다. 효의왕후는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비로 일생을 검소하게 살아 모범이 됐으며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잘 섬겨 칭송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청풍 김씨 시조는 김대유(金大猷)로 신라왕의 후손이다. 고려말 청성(청풍)부원군에 봉해지면서 청풍 김씨 시조가 됐다.

시조의 묘는 명당으로 옛날부터 소문이 자자해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던 중 전쟁이 나서 모두들 피난 갔을 때 하인이 자신의 부모 묘를 그 옆에 감쪽같이 똑같게 썼는데 후에 청풍 김씨가 돌아와보니 두 개의 묘가 너무나 닮아 어느게 진짜 조상의 묘인지 알 수 없어 지금까지 두 개가 그대로 유지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 후손은 조상의 묘 덕에 후손들이 잘 살고 있어 그 묘를 파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두 개가 나란히 있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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