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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백제 금동대향로--1400여년전 숨결 그대로…환상의 예술
[헤럴드경제: 부여=남민 기자] 서기 660년 18만 나당연합군이 구름떼 처럼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진격해오던 날, 도성 밖 능산리 사찰도 아수라장이 됐다. 의자왕의 마지막 충신 계백장군이 황산벌에서 전사했다는 급보가 날아들고 소정방(蘇定方)이 탄 배도 부소산성 아래까지 밀고 올라왔다. 도성은 순식간에 함락됐다.

같은 시각, 사비의 나성(羅城) 동쪽 외곽의 이 능산리 백제왕실 원찰(願刹)에서는 선왕에 예를 갖추기 위해 간직하던 왕실 물건들을 숨기느라 미처 피란갈 겨를이 없었다.

왕실물건 담당관은 쫓기는 몸으로 사찰 내 웅덩이 바닥 진흙 속으로 가장 귀중품부터 밀어넣고 달아났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와서 찾을 요량으로...하지만 그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자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1400년 긴 세월 진흙 속 진공상태에서 잠자다 이 한 사람의 순간 기지 덕에 오늘날 후손들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한 국보 제287호다. 정림사지5층석탑과 함께 현존하는 ‘부여의 백제(사비백제)’ 최고의 혼이 담긴 예술품이다.

나는 이 보물을 천천히 여유를 갖고 보기 위해 부여를 다시 찾았다. 2주전 부여 궁남지와 정림사지 답사여행때 일부러 남겨두고 날을 잡아 새벽 눈길을 뚫고 보러 왔다. 마침 국립부여박물관 문화재와 2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온 차선미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는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스승이 돼 줬다.

설명을 듣는 관람객들

망국 속에 가까스로 숨겨진 이 보물은 발견때에도 극적이었다. 때마침 국립부여박물관이 신축 이전하던 1993년 12월12일 추운 겨울 저녁, 능사리사지 부근 주차장 공사로 땅을 파다가 마지막 철수 직전 웅덩이에서 뭔가 이상한 물체의 실루엣이 아련거렸다. 모두가 놀라 건져올린 것이 1400년 전 엉겁결에 밀어넣은 금동대향로였다. 그 다음날이면 영원히 콘크리트 속에 묻힐 뻔 했던 찰나였다. 

제일 위에 있는 봉황
각종 문양이 세밀하게 조각된 몸체
용의 다리로 바닥부분 구성

이 향로의 예술품적 가치는 그 무엇으로 말한들 설명이 부족하겠다. 나는 이 향로가 실제 향을 피웠을 때 번지는 황홀한 연기의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때마침 부여군청 문화관광과 김선화님이 휴일임에도 달려나왔다. 손에는 혼자 들기 힘들 만큼 책이 듬뿍 들려있었다. 필자한테 부여에 관한 여러가지 공부를 해달라는 ‘숙제’를 안긴 부여군지였다. 휴일도 아랑곳 않고 나와서 향토자랑에 여념이 없다. 최근 2~3년간 부여의 관광자원을 새롭게 정립하고 바로 알리기에 앞장서온 바로 그 김선화님이었기에 반가웠고 또한 미안한 마음이었다.

셋은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 작은 ‘난상토론’을 벌였다. 나는 진품은 보관해야 하니까 가장 유사한 모조품을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실제로 황홀한 연기의 흐름을 보여주는게 최상이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차 선생님은 그렇잖아도 발견 직후 그런 시도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유로 박물관에 강력한 항의가 들어와 중단했다고 한다. 깜짝 놀랐다. 이걸 굳이 종교의식으로 봐야 하는가 싶었다. 백제인들의 혼이 담긴 예술품이자 문화유산인데 후손들은 그 작품을 감상할 최고의 가치를 또다시 못보고 묻어둬야 하나 싶어 상실감이 너무 컸다.

소란 끝에 셋은 정리를 했다. “다시 시도해보도록 건의하자. 국민들 문화적 수준이 그때와 달리 많이 높아졌고 관장도 바뀌고 했으니 우리가 건의해 보자”고 입을 모았다. 김선화님은 꼬박꼬박 메모를 했다. 이것이야말로 금동대향로와 관련, 국민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문화유산의 위대함을 우리 스스로 체험하며 깨우쳐 감으로써 더 소중히 하고 아끼게 될 테니까.

차 선생님 설명에 따르면 이 향로에는 연기 구멍이 모두 12개가 있다. 봉황의 목에 두개, 중첩된 산봉우리 뒷편에 10개가 있다. 향을 피우면, 비가 멎은 뒤 청명한 산봉우리를 휘감은 안개 처럼 감싸고 도는 연기가 장관을 연출했다고 한다. 나는 그 얘기 듣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차 선생님도 당시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향로를 휘감아 도는 그 연기 사이로 신선이 금방이라도 내려올 것만 같은 모습이란다. 나는 이 걸 봐야 금동대향로의 진정한 가치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화 님도 그걸 봐야 한다고 맞장구쳤다.

향로의 맨 위 봉황은 ‘하늘의 세계’를 뜻한다. 5마리의 기러기 사이에 천상의 세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가 있다.

중첩된 산에는 산짐승, 지팡이를 든 사람, 코끼리, 상상의 동물 등이 조각돼 있는데 이는 ‘산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중간부분 띠 아래쪽에는 연꽃이 피어있다. 이는 불교와 ‘수중의 세계’를 상징한다. 연꽃에는 사슴뿔이 달린 상상의 물고기들이 있다.

받침대 용은 입으로 향로를 떠받치고 있는데 네개의 다리 중 세개는 서로 휘감아 바닥을 지탱하고 하나는 발톱을 세워서 치켜올렸다. 이 용은 ‘지하의 세계’를 뜻한다.

결국 금동대향로는 ‘하늘ㆍ산ㆍ수중ㆍ지하의 세계’를 상징, 우주만물이 다 함축돼 있는 백제인 예술의 정수로 꼽힌다.

높이 61.8㎝, 무게 11.8㎏의 이 향로는 전체적으로 둥글게 생겼다. 몸통도 바닥부분도 그렇다. 이는 자칫 안정감이 떨어져 보일 수도 있는데 백제인들은 그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둥글게 얽힌 용의 세 다리 모두가 바닥에 닿지않고 세개의 꼭지점을 만들어 지면에 닿게 해 전체적으로는 살짝 뜬 모습을 연출했는데 이는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섬세한 기술력을 발휘했다. 

봉황의 다양한 각도로 본 모습

이 위대한 걸작품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보면 볼수록 소름이 솟구쳤다. 나는 아예 부여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혼자 다시 들렀다. 어제 여러사람과 함께 볼 때와 사뭇 다른 느낌이 가슴을 두드렸다. 이 좁은 독립공간 속 침침한 조명 아래 나와 금동대향로 뿐이다. 이 분위기는 나를 1400년 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멈춰 세웠다. 정적이 감돌자 그 어떤 느낌은 두렵기도 했다. 아비규환 속 진흙에 파묻혔다 이제야 돌아온 백제 최고의 예술품이 아닌가. 혼자 천천히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문득 1400년을 훌쩍 건너뛰어 이 시대의 후손들에게 백제인의 망국의 한이 담긴 ‘타임캡슐’로 나타난 게 섬뜩했다. 나는 여건이 된다면 꼭 혼자 아무도 없을 때 이 백제금동대향로를 느껴보길 권하고 싶다. 여럿이 보면 ‘잘 볼 수’ 있고, 혼자서 보면 ‘깊게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이것만큼은 보는 것에 그치지말고 느껴보면 좋을 것 같다. 간간이 단체관람객이 오가면서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나는 이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찍은 사진만도 120장이나 됐다. 시계를 보니 9시 문 연 직후 들어왔는데 벌써 11시가 살짝 넘었다.

발견 당시 모든 학자들이 백제유물이 아니라 중국의 박산향로라고 입을 모았다. 백제유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백제유물의 확실한 증거가 나왔다. 향로의 받침 용이 공주 무령왕릉서 발견된 동탁은잔의 모양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산봉우리의 중첩된 모양새는 부여 규암에서 출토된 전돌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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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형 그대로 1400년을 견뎌온 비법 : 여기엔 두가지 ‘비법’이 있었다. 하나는 진흙 속이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수은 아말감 기법’이 동원됐다는 것이다.
물기있는 진흙은 공기를 차단했고 밀폐된 상태로 온전히 보존됐으며 어떠한 충격도 흡수되는 최고의 보관처가 됐었다.

또 수은 아말감 기법은 향로의 틀은 동(銅)으로 만들고 그 골격에 금가루를 수은을 녹인 액체와 반죽해 틀에 몇번이고 덧칠했다. 그 다음 향로를 통째로 가열해 수은 성분을 완전히 제거했다. 수은이 동에 방해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미 1500년 전 백제인들이 가진 놀라운 기술이었다.

■ 국립부여박물관의 또다른 주요 유물 :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전승기념문을 새기다 포기한 석조(石槽)가 있다. 차돌 성분이 많은 화강암이어서 조각때 돌이 떨어져 나가 300여자 새기다 포기하고 정림사지 5층석탑에 완성문을 새겼다고 한다. 엄청난 크기의 석조로 연꽃을 여기에 심었다.

또 다른 유물로 호자(虎子)가 있다. 호랑이 모습을 한 요강이다. 이 시대 사용했던 호자가 오늘날 병원에서도 환자에게 재질만 다를 뿐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게 놀랍다.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한 또다른 진귀한 유물. 왼쪽부터 연꽃을 심던 석조, 요강인 호자, 성왕의 유골을 모셨던 사리감

창왕명석조사리감이 능사리절터에서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뚜껑은 도굴됐지만, 전면에 한자로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백제창왕십삼년대세재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라고 새겨져 있다. 해석에 논란은 있었지만 대체로 성왕의 아들 창왕이 만든 것으로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리를 공양, 보관했다’는 뜻이다. 이 글이 능산리 절이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고 있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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