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비엔날레PD를 아세요?” 한국의 비엔날레PD 1호 이용우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신문기자에서 출발해 평론가, 교수, 큐레이터를 거쳐 지금은 광주비엔날레를 이끄는 문화CEO인 이용우(64) (재)광주비엔날레 대표는 ‘국내 1호 비엔날레PD’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 김동호가 있다면, 광주비엔날레에는 이용우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비엔날레’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20년 전에 광주비엔날레를 기획해 지금의 광주비엔날레를 세계가 주목하는 아시아 정상의 비엔날레로 키워낸 주역이다. 광주 이후 전국의 지자체가 비엔날레를 잇따라 만들며 국내에 비엔날레가 성시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그로부터 진정한 비엔날레 문화란 무엇인지, 비엔날레PD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전하고싶은 말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당신을 ‘비엔날레 PD’(Producer)로 부르고 싶다. 그 타이틀을 어떻게 생각하나?

-최근 외국의 어느 미술관장이 나를 ‘비엔날레 맨(biennale man)’이라고 부르더라. ‘비엔날레 맨’이건 ‘비엔날레 PD’이건 비엔날레와 사랑에 빠져 동거 중이라는 말로 들려 나쁘지않다. 부산영화제의 김동호 전 위원장이 ‘영화 맨’이라는 말이 듣기 좋다고 내게 그러더라. 일부종사에 대한 미덕처럼 들린다. 


▶일간신문 문화부 기자로 처음 미술에 입문한 것으로 아는데, 여러 직업을 거쳐 문화CEO가 됐다.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면?

-한국의 산업화및 민주화, 그리고 오늘의 디지털시대를 관통해온 사람이 모두 겪은 격동의 시간에 나도 포함될 것이다. 나는 1970년대에 언론인으로 출발해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교수, 비엔날레 예술총감독, 비엔날레 대표를 겸업하면서 숨가쁜 인생전환을 이루었다. 한 직업으로 한 우물을 판 사람에 비하면 다소 ‘바람 난’ 사람이다. 절반은 한국에, 나머지 반은 국제사회에 나 자신을 내놓고, 경쟁하며 살아왔다.



▶그동안 해왔던 일이 연계되긴 하지만 어떤 일이 가장 적성에 맞고 흥미로왔나.

-시각문화 현장의 글쟁이나 비평가로서의 나를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시각문화는 연구영역이 매우 넓고, 인문학, 사회학을 통합해 담론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좁은 용어로는 이제 더 이상 시각문화 현장을 설명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성장과정은 어땠나?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길러진 건가?

-나는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난 농부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문화니 예술이니 오늘날 내가 종사하는 분야는 전적으로 후천적 DNA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말을 믿지않는다.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지 없는데서 어떻게 유(有)가 나오는가. 눈 녹은 가랑잎 밑에서 곤충이 나오는 것은 그 속에 곤충발생을 위한 유기물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시를 썼고, 언론사 시절 미술이론을 전공했으며,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내게 약간의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독서와 글쓰기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슬하의 세 자녀가 모두 국제무대에서 활동 중이다. 늘 국제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가? 자녀들에겐 어떤 아버지인가?

-큰 딸은 펜실베니아 주립대에서 교수로 디지털미디어를 가르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술가가 된 셈이다. 둘째는 한국의 모 교육재단에서 국제관계 일을 하고 있으며, 셋째는 미술사를 전공하고 현재 구직 중이다. 아버지의 직업이 그런대로 괜찮아 보여 미술사를 전공했는데, 직장을 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불평이다. 나는 내 자식들의 조언자이자 친구로 매우 즐겁다. 


▶광주비엔날레가 탄생한 이래 한국서도 비엔날레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난해하고 실험적인 미술제인 비엔날레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까닭은? 그리고 일회성이 아닌 전문인력 확충과 시스템 구축이 중요하다는데 그 이유는?

-한국에서 비엔날레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서 심경이 좀 복잡하다. 국내에만 벌써 10개의 비엔날레가 있다. 대중성이 별로 없는, 난해하고 실험적인 비엔날레가 그토록 많아진 것은 광주비엔날레의 성공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1995년 첫 해에 163만명의 관객이 들었고, 국제 사회의 광주비엔날레 인식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자치단체들이 한번 쯤 욕심부릴만한 아이템이 된 것이다. 미술관이 늘듯 비엔날레도 늘고 있는데 곧 필요한만큼 재편될 것이라 본다. 그런데 비엔날레는 미술관처럼 되어선 안 된다. 그 아름다운 저항정신, 실험적인 기능을 상실해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광주비엔날레는 감독으로 선임됐던 신정아 씨의 학력위조 문제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들려달라.

-광주비엔날레가 2007년 신정아 씨를 예술감독으로 선정하면서 이른바 ‘신정아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그 1년 후인 2008년에 광주비엔날레 상임부이사장을 맡았다. 당시 신 씨가 감독으로 정식계약을 맺기 전 검증단계에서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비엔날레측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내가 비엔날레를 맡았을 때도 후폭풍이 여전했다. 심지어는 재단을 맡은 나까지 갑자기 검증대상이 됐는데, 그 이유는 외국의 저명대학에서 박사를 했다는 까닭에서였다. 



▶올들어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로 재선임됐다. 비엔날레에 어떤 변화를 주고 있나?

-광주비엔날레의 나름대로의 성공요인은 개방성이다. 국제사회에 비엔날레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감독이나 참여작가 모두에게 인종이나 국적, 종교, 사상 등 어떤 이유에서도 제약을 두지 않는다. 누구라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임되고 참여하게 한다. 나보다 훨씬 더 비엔날레를 발전시킬 수 있는 많은 분들이 있지만, 나의 재임기간에는 비엔날레의 국제적 도약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비엔날레가 단순히 글로벌 사이즈의 전시장소라는 인식을 없애기 위해 학문적 배경을 더하려고 애쓰고 있다. ‘눈’이라는 현대미술비평 전문저널을 발간하고 있으며, 국제큐레이터코스를 만들어 4년째 운영하고 있다. 또 정책연구실을 두어 대내외 전략과 학문적 연계성을 강화하고 있다.



▶광주비엔날레가 20년을 바라보고 있다. 그동안 난관도 많았겠다.

-시민사회와의 소통이 가장 어렵다. 난해하고 실험적인 비엔날레를 어떻게 시민들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맥락으로 치환시키느냐가 관건이다. 나는 비엔날레가 단순히 미술전시회라고 생각한 적은 절대로 없다. 비엔날레는 담론의 플랫폼이고, 문화가 다양하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쟁의의 장소’이다. 이런 문제를 소화해내는 것은 절대로 용이하지 않다. 비엔날레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생산절차를 갖고 있지만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은 천차만별이고, 대부분 비전문가들이다. 그 사이에서 고민이 크다. 참여와 소통은 절대로 중요한 과제이지만 그 용어의 남용도 경우에 따라선 악몽이 되기도 한다. 



▶2014년이면 광주비엔날레가 창설 20주년을 맞고 10회 전시가 치러진다. 중요한 분기점이 될 텐데 어떤 구상을 하고 있나?

-광주비엔날레는 전 세계 비엔날레 가운데 유일하게 선언문을 갖고 있다. 창설 근거를 ‘광주의 시민정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광주비엔날레 20주년은 선임될 감독에게 광주의 5.18에서 오늘날까지의 시민사회 의식의 발전과 예술과의 혼합적 맥락을 검증해보는 전시기획을 상의할 것이다. 그리고 비엔날레의 상투적 전시맥락을 넘어서는 이질적 기획도 생각해볼만 하다. 비엔날레가 담론의 장소라면 심지어 종교와 철학, 과학의 문제까지 담론해보는 토론장으로 만들고 싶다.



▶제1회 세계비엔날레대회가 지난 10월 광주에서 열렸다. 세계대회가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비엔날레 생산자들이 한군데에 모여 공통의 고민을 논의해보는 비엔날레반성의 자리였다. 그리고 비엔날레 간의 정보교환이나 철저한 연구를 위한 가칭 국제비엔날레협의 설립 등의 의제도 논의되었다. 세계비엔날레대회는 매 2년마다 정례화가 결정되었고 2년 뒤의 모임도 브라질의 상파울루에서 열릴 가능성이 크다. 


▶전세계적으로 비엔날레가 퇴조하는 추세라는 진단도 있다.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며 향후 비엔날레는 어떤 방향으로 갈 거라고 예측하는가.

-카메라가 나왔을 때 그림은 소멸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텔레비전이 나왔을 때 신문은 기능을 상실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림과 신문은 다른 기능을 통하여 구체성을 획득해왔다. 비엔날레가 급상승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시대적 요구와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해 급증하는 시각문화현장에 대한 다양한 요구와 욕구를 수용하는 장치로 비엔날레가 대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선한 현장성과 넘치는 실험성, 급진성, 장소성이 비엔날레의 무기였다. 나 자신도 비엔날레들을 돌아보면서 비엔날레 간의 유사성이나 반복성, 권력지향적 태도에 놀라고 있다. 반성하고 지양되어야 할 대목이다. 그렇다고 비엔날레가 퇴조한다고 볼 수는 없다. 미술관이 없어지거나 아트페어가 소멸할 수 있겠는가? 



▶아시아 현대미술의 현주소는 어떻다고 보는가? 또 한국작가들이 풍부한 미술 담론을 생산해내고 있다고 보는가? 역량을 평가한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미술인들은 아시아의 등극을 논하면서 시장을 먼저 이야기한다. 미술시장의 아시아로의 이동을 이야기하면서 아시아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양 사람들이 바라보는 아시아의 등극에 대한 이유와 별로 다르지 않다. 나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시장은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그리고 건강한 상업주의는 예술의 부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아시아현대미술에 대한 ‘다시보기’를 통하여 과거 채 발견되지 않았던 중요한 의식의 누적과 미학적 결들이 오늘날 새롭게 조명되고 재발견의 기회가 다양하게 마련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아직도 파당적인 부분이 많다. 권력 지향적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역동성이 될 수도 있지만 과거 반세기의 현대미술 속에서의 경험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이 대표는 뛰어난 달변가라는 평을 듣고 있다. 타고난 건가 아니면 꾸준한 노력에서인가.

-나는 내가 달변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말을 해놓고 후회하는 적이 많다.


▶국제적인 인맥이 매우 넓은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인맥을 넓혔는지? 그리고 좋은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우물 파는 사람들한테 들으니 지하로 100m쯤 파내려가면 영양분이 풍부한 큰 수맥을 만난다고 하더라.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 100m를 파고 들어가겠는가. 다만 유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언젠간 만나진다고 믿는다.



▶평소 한 달에 몇 권정도 책을 읽나?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5권쯤 읽는다. 그동안 사회과학 서적을 지독하게 읽다가 요즘에는 과학서적 및 윤회, 환생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있다. 내게 맞는 책이 따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책에 대한 추천은 사실상 의미가 별로 없다. 


▶예술, 문화 이외에 주목하는 분야가 있다면 무엇이고, 이유를 설명한다면?

-종교이다. 그냥 기독교, 불교, 유교, 이슬람, 힌두교 등이 아니라 철학과 과학으로서의 종교이다. 신격화하거나 금기시, 또는 숭배대상으로서의 의식적 종교가 아니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실증으로서의 종교를 말한다. 그래서 신격화한 우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만져지는 신(존재)을 토론하는 종교적 담론에 아주 주목한다. 사실은 비엔날레에서 이러한 것을 한 번 해보고 싶기도 하다.



▶현대미술계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은? 비엔날레 PD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생각을 크게 하고, 죽도록 공부하며, 의식의 제한 없이 덜 호사스럽게 살 자신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자유롭게 뻗어가는 다양한 백남준이 우리 사회에 더 나왔으면 좋겠다.

/yrlee@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batong@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