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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8년 금호타이어 곡성공장 신입사원 면담실, 고졸 청년의 꿈은 부장이었다...대졸사원에겐 없는 현장 능력으로 한해 2000건의 제안서를 써냈다...제안서 70%가 버려질때 동료들은 날 조롱했지만 난 3할 타자라고 주문을 외었다...역발상 아이디어로 윤활유 만들어 잭폿…준비된 자에게 승진 고속도로는 예정된 길이었다...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이제 겨우 인생 3분의 1 왔을뿐, 종료휘슬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
78년 금호타이어 곡성공장 신입사원 면담실, 고졸 청년의 꿈은 부장이었다. 대졸사원에겐 없는 현장 능력으로 한해 2000건의 제안서를 써냈다. 제안서 70%가 버려질때 동료들은 날 조롱했지만 난 3할 타자라고 주문을 외었다 역발상 아이디어로 윤활유 만들어 잭폿…준비된 자에게 승진 고속도로는 예정된 길이었다.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이제 겨우 인생 3분의 1 왔을뿐, 종료휘슬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




▶빚쟁이집 아들 제안왕이 되다=윤 대표는 군 복무 시절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흑산도에서 잡은 생선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무역회사 사장이었다. 명색이 사장님 아들이었던 윤 대표는 아버지의 사망으로 졸지에 청년 가장이 됐다. 덩달아 아버지가 사업으로 짊어진 빚까지 떠안게 됐다. 군 제대 후 가장 힘들고 위험한 일부터 닥치는 대로 했다. 생계를 유지하고 동생 대학 등록금을 벌어야 한다는 절박함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일용직으로 전전하다 정식으로 첫 둥지를 튼 곳이 금호타이어 곡성공장 기능직이다. 고졸 인력 정원 32명에 120명이 몰렸다. 윤 대표는 기능공 채용에서 1등으로 입사해 기능공 학생장으로 임명됐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공부를 제대로 못한 설움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했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1등이란 것을 해봤다. 1등을 하니 세상이 보이더라.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거 같다.”

이 작은 학생장 하나가 윤 대표의 인생을 갈랐다. 공정 배치를 받기 위해 인사과장, 생산과장, 교육과장들과 상담하는 자리에서 어떤 근로자가 되고 싶은지 질문을 받았다. 윤 대표는 당당하게 부장이라고 말했다. 학생장으로 열심히 하면 주임, 대리, 과장, 차장 등의 순서를 밟아 부장까지 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교육과장은 전문대나 고졸은 별도의 인사제도가 없다며 한심한 듯 얘기했다.

“충격이었다. 입사 초년 시절부터 고졸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동시에 오기도 생겼다. 그럼 일단 반장부터 되기로 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 최초로 고졸 출신 부장이 돼 보자고 결심했다.”

이때부터 신분 상승을 향한 윤 대표의 치열하고도 고독한 질주가 이어졌다. 공장에서는 불량품이 나오거나 특정 공정에서 생산성이 떨어지면 기능직이 대졸 사원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보고서를 올리곤 했다. 보고서에는 불량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제안서도 함께 첨부했다. 윤 대표는 이 부분에 승부를 걸었다. 


“대졸 사원에게 가는 보고서와 제안서를 언젠가는 높은 사람도 볼 것이라 생각했다. 대졸 사원에게 없는 현장 능력을 나의 강점으로 삼았다.”

이에 윤 대표는 보고서를 영어와 한문을 섞어 작성했다. 일단은 간부들의 눈에 띄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모든 보고서에는 구체적으로 대안을 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공정만 들여다봤지만 윤 대표는 모든 공정을 연구하며 문제점을 파고 들었다. 말그대로 제안에 미친 사람이 됐다.

“하루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제안서 쓰는 시간이 모자라서 밥먹으면서도 썼고, 신문 보는 시간도 아까워서 식사 중 부인이 읽어줄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1983년 1800건 이상의 제안서를 올렸고, 1985년에는 2000건 이상을 써내며 ‘제안왕’으로 등극했다.

▶외로움은 사치, 이 악물고 대졸 문턱에 들어서다=제안왕 덕분에 반장이 된 윤 대표는 금세 공장에서 소문이 났다. 고졸 주제에 왜 영어와 한문으로 보고서를 쓰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제안서를 제출하냐는 비난이 난무했다. 노조위원장이 찾아와 제안하지 말라며 반협박을 하기도 했다.

“나랑 마주앉아 밥을 먹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시기와 질투를 한몸에 받았다. 심지어 민주화를 위해 심어진 위장 취업자라는 유언비어까지 돌았다.”

그러다 1987년 6ㆍ29 선언 당시 강성 노조원들이 직원들의 출근을 강제로 정지시켰다. 1주일 회사를 못 가자 당장 빚과 동생 학비 걱정에 시달렸다. 곧바로 노조원들의 멱살을 잡고 복귀를 요구했다. 당시 윤 대표의 눈빛에는 강성 노조보다 더한 생존에 대한 집념이 있었다.

이처럼 전진만을 바라보는 윤 대표에게 주변의 시선을 느끼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 많은 제안 아이디어 중에 70%가 버려지는 것을 보고 동료들의 조롱이 쇄도했지만 윤 대표는 본인 스스로 ‘3할대 타자’라고 주문을 걸었다.

한방 홈런을 치기까지는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당시 타이어를 만드는 과정에는 완제품을 만드는 기계에 쓰일 윤활유를 만드는 절차가 있었다. 윤활유는 유약을 넣은 뒤 분말을 집어넣어 저으며 섞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잘 섞이지 않고 분말이 넘쳐 작업장에 날리는 문제도 발생했다. 빨리 해야 한 통당 30분이 걸렸다.

“잠들기 전이나 눈 뜨고 일어나자마자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만 생각했다. 왜 미국과 유럽이 하는 방식대로만 따라야 할까.”

이 ‘왜’를 계속 되새기다 보니 실마리는 의외의 장면에서 나왔다. 어느 날 집에서 부인이 커피 타는 것을 보게 됐다. 커피가루, 프림, 설탕 순으로 넣고 물을 부었다. 순간 무릎을 쳤다. 반대로 해보자.

당장 다음날 오전 4시에 출근해 100통에 분말을 먼저 넣고 유약을 섞은 뒤 저어보았다. 놀랍게도 작업시간이 반으로 줄었다. 간부들이 출근해서 보니 생산성이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새로운 방식은 공장장에게 최종 보고돼 전격 채택됐다. 이후 전체 가동률은 5% 증가했고, 이는 타이어 1개 만드는 데 10초 단축됐다. 덕분에 1년에 추가 생산되는 타이어가 3만개 생겨났고 이는 당시 1500억원 효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제안에 미쳤던 윤 대표는 마침내 잭폿을 터뜨렸다. 공장 생산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관리팀으로 발탁, 주임 자리에 올랐다. 고졸은 주임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을 깬 셈이다. 대졸자가 주임이 되기까지 3년이 걸리지만 윤 대표는 12년이 걸렸다.

▶준비된 자에 찾아온 기회, 승진 고속도로를 타다=주임을 달긴 했지만 대졸자들 틈 사이에선 여전히 벽이 높았다. 이에 윤 대표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국제품질관리대회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밤낮없는 연구로 국가대표 진출권을 따냈다. 금호그룹 최초의 일이었다. 일본 도쿄대에서 열린 발표장에 윤 대표는 한복을 입고 꽹과리를 치며 시선을 끌었다. 신문이 이를 크게 보도하자 청와대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 초청으로 윤 대표는 청와대에서 성공사례를 발표하게 됐다.

대통령과 함께 헤드 테이블에 앉았다는 얘기가 고(故)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귀에 들어갔다.

“일개 직원이 회장님을 만나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회장께 대통령과 나눈 대화를 그대로 전했다. ‘저는 근로자지만 내 능력을 인정받고 국가가 알아줄 것입니다. 세계 최고 타이어를 만들겠습니다.’ ”

주임에서 막 대리로 승진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왜 이런 사람이 아직까지 대리냐며 대졸 사원과 똑같이 차장으로 승진시키라고 지시했다. 윤 대표는 게다가 부서도 회장 부속실로 옮겼고, 서울대 대학원까지 진학하는 기회를 얻었다.

회장 부속으로 옮긴 뒤부터는 승승장구의 시기를 보냈다. 명문대 출신들 사이에서 윤 대표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분야는 밑바닥부터 쌓아온 현장 경험이었다. 노사 문제로 경영진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도 대졸 관리직들은 보고만 할 뿐 대안은 없었다. 이를 틈타 윤 대표는 노무관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회장에게 직접 제시했고, 노조위원장을 만나 설득하며 분쟁을 잠재우는 일등공신이 됐다. 파업으로 중단됐던 공장이 돌아갔고, 생산은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윤 대표는 차장에서 2년 만에 부장이 됐고, 다시 2년 만에 상무로 승진했다. 대졸 공채도 하늘의 별 따기라는 임원을 고졸 기능직이 거머쥔 것이다. 차장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상무가 되는 데는 6년밖에 안 걸렸다. 서울대 출신 부장들보다 3년 먼저 상무가 된 셈이다. 이후 윤 대표는 금호그룹 인재개발원장에 오른 뒤 전무로 퇴임했다. 32년간 금호그룹에 몸담으면서 7번의 특진을 기록했고, 절반을 회장 부속실에서 보냈다.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후반전과 연장전은 계속된다=고졸에서 대기업 전무로 퇴임했으면 성공한 인생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많은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그러는데 아직 3분의 1밖에 안 왔다. 내 능력은 무궁무진하다. 인간은 미치면 학력은 상관없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느꼈다”고 말한다.

현재 윤 대표는 창조경영연구소를 운영하며 경찰대와 한양대 대학원 겸임교수로 있다. ‘미치게 살아라’ 외 4권의 책을 펴내며 정리한 자신의 인생을 소재로 대학생과 경영자들에게 강의도 하고 있다.

또 선진 D&C를 경영하며 신재생 에너지 분야에도 힘쓰고 있다.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기술개발이라는 생각에서다.

“나는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반드시 다음 목표를 정한다. 대기업 전무 퇴임으로 전반전은 끝났다. 제일 자신 있는 분야가 기술개발이기 때문에 후반전은 신재생 에너지에 모든 힘을 쏟아부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보여줬던 모습과 달리 에너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세상을 놀라게 하기 위해 ‘대단한 것’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만 강조했다. 이미 기능직에서 전무로 변신한 신화를 쓴 그이기에 윤생진표 인생 2막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윤 대표가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 문구가 인상적이다.

“나는 한 번이라도 세상을 긴장시켜본 적이 있는가!”

정태일 기자/killpas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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