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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영동’ 정지영 감독, “ ‘지식인’ 이라는 단어가 창피한 사회”
“‘지식인’ 이라는 단어가 창피한 사회…집권자에 따라 바뀌는 민주주의는 허약”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고 김근태 고문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스크린쿼터 운동이 한창이던 몇 년 전 김근태 고문이 설립한 한반도평화와 경제발전 전략연구재단에서 저에게 상을 준 것이 첫 인연이었죠. 저를 잊지는 않고 있었는지 촛불시위 때 우연히 곁에 있었는데, 집회 사회자가 저를 소개하지 않고 넘어가자, 큰 목소리로 ‘여기, 정지영 감독님도 와 있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시더군요.”

전 민주통합당 고 김근태 상임고문의 민주화 운동 시절, 정권으로부터 당한 끔찍한 고문을 그린 ‘남영동 1985’(22일 개봉)의 정지영 감독(66)은 생전의 고인부터 술회했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감독은 “스크린쿼터 운동 때 영화인과 국회의원 자격으로 몇 번 만난 게 다”라고 했다. 그러면 고인의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어떻게 만들게 됐을까?


“오래 전 소설 ‘붉은 방’(임철우 지음, 1988년 발표)을 읽고 고문가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 속 경찰은 고문실에선 철저히 야만적인 행위를 일삼다가도 가정에서는 성실한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는 모습이 그려지죠. 소설은 먼저 장선우 감독이 영화화하려다 서슬 퍼런 당시 시대 분위기 때문에 결국 무산되고, 저는 저 나름대로 고문경관 이근안을 모델로 한 영화를 구상중이었습니다. 시나리오를 끝까지 쓰지 못하고 천운영 작가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소설로 쓰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천운영 작가가 소설을 쓰고, 제가 영화화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나온 작품(‘생강’)을 보니 저하고는 색깔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부러진 화살’ 개봉을 준비중이었던 지난해말 김근태 고문이 타계하고, 고인이 쓴 수기 ‘남영동’을 읽게 됐습니다. 읽자마자 제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가 풀리더군요. 곧바로 영화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정지영 감독은 참혹한 고문의 현장을 스크린에 옮기면서 “관객이 고문 피해자만큼 아파할까”를 두고 가장 고민했다. “관객들이 아픔을 공유해서 과거 시대의 폭력을 반추하고 반성해보자는 게 영화를 만드는 목표”였기 때문이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고문피해자 모임인 ‘진실의 힘’도 찾았다. ‘진실의 힘’은 대부분 민주화 운동과는 비껴나 있었지만 어느날 아무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간첩조직 관련자로 조작된 이들의 모임이다. 물질적, 정신적 보상은 물론이고, ‘사회 민주화에 이바지했다’는 자긍심으로부터도 소외돼 이중의 고통, 이중의 트라우마로 평생을 상처 속에 보내야 하는 이들이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치유를 위해 모인 단체다. 정지영 감독은 “그들을 만나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했다. 지난 6월 진실의 힘이 인권상 수상자로 김근태 의원을 선장해 마음의 짐을 덜었다고 정 감독은 덧붙였다. 


정 감독은 영화의 배경이 된 1980년대 중반 어땠을까? 데뷔 초창기였던 정 감독은 당시 주로 멜로와 스릴러 영화를 연출했다.

“역사나 사회를 소재로 한 영화는 꿈도 꿀 수 없었죠. 제가 당시 한수산 작가의 ‘거리의 악사’를 원작으로 동명 멜로영화를 만들었는데, 스토리가 연결이 안 될 정도로 필름이 잘려 누더기가 됐어요. 시위 장면은 아예 찍지도 못했어요. ‘운동권인 주인공이 시위를 벌이다 끌려가 사랑하던 여학생이 면회를 간다’는 내용을 교정에서의 함성, 학생이 군용지프를 타는 장면, 여자가 주인공을 면회하는 대목 등 몇 컷으로 표현했는데, 그것마저 잘렸어요. ‘여주인공의 어머니가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동네가 재개발 지구로 결정되고, 사람들은 반발하지만 결국 철거를 막지 못하고 생계 수단을 잃은 어머니가 충격을 받고 죽는다’는 긴 내용을 ‘간판이 떨어진 가게와 어머니의 기절 장면, 병원에 누운 신’ 등 3~4컷으로 요약해 만들었는데, 다 잘리고 뜬금없이 여주인공이 어머니의 재를 뿌리고 있는 쇼트만 남았습니다. 그런 시대에 영화를 했죠.”


정 감독은 “지금 만드는 영화를 왜 그때는 못 만들었냐고 한다면 할 말없다”며 “영화 감독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했던 때”라고 말했다. 그래도 정 감독은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은 작품을 통해서 숨겨진 사회 문제를 들춰내고 파헤쳐 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자타공인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가 전면에 드러난 작품은 한국 전쟁 전후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한 1989년작 ‘남부군’이었다. ‘권력과 역사, 개인’이라는 화두는 베트남전 파병군의 삶을 다룬 ‘하얀 전쟁’으로 이어졌다. 90년대말 이후 기획했던 님 웨일즈 소설 원작의 ‘아리랑’ 등 시대극 제작이 번번히 무산되면서 한동안 공백기를 가졌던 정 감독은 올해 초 ‘부러진 화살’로 다시 한번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며 성공적인 ‘재기’를 했다. 일반 스탭들을 제외하고 배우들과 각 분야 팀장급 영화인들의 노 개런티 출연으로 저예산에 맞출 수 있었던 ‘부러진 화살’은 342만명이나 동원했다. 정 감독은 “수익의 60%는 배우들과 스탭들에게 나눴다”며 “안성기씨는 이제까지 받은 출연료 중 가장 많더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투자자의 외면과 현실에 발맞추지 못한 기획 등으로 나이 50줄에만 들어서도 작품활동이 어려운 국내 영화계의 ‘조로’ 풍토에서 환갑을 일찌감치 넘기고 일흔 가까운 나이에 현실과 뜨거운 호흡을 하는 정 감독의 존재는 여러 모로 젊은 영화인들에게 힘이 되고 있다. 

“제가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권력과 개인의 문제입니다.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개인의 권리를 훼손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권력이라는 것은 크게는 세계적으로는 미국, 중국 등 열강이 될 수도 있고, 좁게는 ‘부러진 화살’의 사법권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 감독은 스스로도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고 즐겨 말한다. 그와 함께 했던 배우들은 “한량이자 소년이고 진정한 어른”이라고도 한다. 그 중에서도 정 감독의 치열한 현실인식을 아우르는 것은 ‘지식인’의 면모일 것이다.

“지식인이란 자신의 이해와 상관없는 사회 문제를 비판하고 참여하는 존재라고 하죠.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선 ‘지식인’이 참 창피한 단어가 돼 버렸습니다. 권력과 기득권에 길들여져 민감한 현안은 무조건 회피합니다. 대학에서 교수는 침묵하고 학생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 필요한 때입니다.”

정 감독은 폭력과 고문의 과거사에 카메라를 갖다 댄 ‘남영동 1985’에 대해 “대선에 영향을 끼치는 작품이 됐으면 물론 좋겠다”며 “대선 후보들이 모두 와서 관람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지금의 우리 사회를 “어느 세력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허약한 민주주의”라며 “민주주의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바뀌어서는 안 되는, 사회의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정 감독은 차기작에 대해 “역시 역사적 실화와 실존 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할 것”이라면서 “분단을 소재로 한 애틋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리겠다”고 말했다.


/suk@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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