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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준 희망가족 여행기<25> 부끄러운 역사를 아프게 기억하는 사람들, 독일 베를린
[베를린(독일)=이해준 문화부장]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마치면서 여행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첫째 아들의 군 입대를 위해 아내와 함께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한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에서 여행을 시작할 때엔 조카까지 5명이었지만, 이제 필자와 둘째 아들로 확 줄었다. 둘째도 10여일 동안 독일과 북유럽을 여행한 다음 ‘본업’인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귀국한다.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꿈과 진로를 찾은 사람이 하나씩 떨나는 것이 꼭 인생사 같다. 떠나는 사람은 떠나고 남은 사람은 또 앞으로 펼쳐질 행로에 어떤 새로운 희망이 찾아올까 설레는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여행이요, 삶 아닌가.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 서서 앞날을 개척할 수 있는 내면의 힘과 자신감을 얻으려 하는 것이 장기여행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가족이 절반으로 줄어들자 가슴에 구멍이 뻥 뚤린 것처럼 허전했다. 유럽의 저가항공 이지젯을 타고 마드리드에서 독일 베를린으로 이동해 숙소에 여정을 풀 때까지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필요한 말만 할 뿐이었다. 그만큼 동고동락했던 지난 반년 이상의 해외 유랑이 가족에 대한 애정을 잔뜩 쌓아놓은 모양이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면 다시 걸어야 했다.

극과 극으로 치달았던 굴곡진 독일 근현대 역사를 간직한 채 처연하게 서 있는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이곳이 독일 통합과 분단, 재통합의 현장이었다.

베를린 숙소에 여장을 풀고 독일 근현대사의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향했다. 파리저 광장 한 가운데 서 있는 브란덴부르크문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동서독을 가르는 분단의 상징이 됐다. 1989년 드디어 장벽이 붕괴되자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광장으로 몰려나와 바로 이 문 위에서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던 것은 잊을 수 없는 현대사의 한 장면이었다. 분단의 상징이 통일의 상징으로 바뀐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마음의 반전도 일어났다. 브란덴부르크 문 일대의 큰 공원인 티어가르텐과 그 앞의 대로인 운터 덴 린넨을 몇 시간 걷고 나니 몸의 힘이 빠지면서 마음도 점차 가벼워졌다.

허전한 마음을 그렇게 달랜 다음날, 베를린과 주변 지역 탐방에 나섰다. 다른 유럽의 도시들이 고대~중세~근대로 이어지는 역사를 보여주었다면 베를린은 현대사의 고장이었다. 그 현대사는 부끄러운 상처 투성이의 과거를 아프게 기억하고 있었다.

1961년에서 1989년까지 27년간의 분단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베를린 장벽. 자유를 찾기 위해 이 장벽을 넘다가 455명이 생명을 잃은 현대사의 비극을 말없이 웅변하는 듯하다.

먼저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포츠담의 체칠리엔 궁으로 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질서를 결정한 곳이자, 한국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베를린에서 남서쪽 25km에 위치한 포츠담은 조용한 전원마을 같았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이 이곳에서 만났다. 승전국 대표들은 여기에서 독일의 무장해제와 배상금 징수를 결의하는 등 전후 유럽 질서의 기본 방향을 수립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이 이에 응하지 않자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 전쟁을 종식시켰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둘째는 “베를린이 폐허가 되니까, 좋은 곳에 와서 회의했네”라며 나름 명쾌한 분석을 내놓았다.

작고 아담한 곳이지만, 이곳이 새로운 세계질서의 탄생지였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당시 회담장 모습은 물론 각국의 대표단 사무실 등을 회담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었다. 에피소드를 곁들인 오디오 가이드는 환상적이었다.


포츠담에서는 그 회담장을 보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므로, 체칠리엔 궁만 둘러본 다음 다시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베를린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은 베를린 장벽의 생생한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이었다.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은 겉에서 보는 것과 안에 들어가서 보는 것이 전혀 달랐다. 대부분의 박물관이 거대한 외관을 하고 있는데 반해 이 박물관은 입구가 작은 상점 입구 같았고, 건물도 시내 중심가의 그저 그런 건물이었다. 특정 주제에 관심이 많은 민간인이 세운 소박한 전시장 같았다. 하지만 들어가 보니 수집해 놓은 전시물과 그 내용이 엄청났다. 입이 쩍 벌어졌다.

박물관에는 자유와 인권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과 투쟁의 역사를 그 어느 곳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념의 차이 때문에 만들어진 장벽을 넘은 사람들의 생생하고 절절한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들을 당시의 자료들을 통해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종전에 이어 세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개의 체제로 나뉘어지고, 이 과정에서 독일이 분단되고, 양 진영이 으르렁거리던 냉전의 역사가 생생하게 전시돼 있었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냉전이 심화하면서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건설돼 가족과 친지가 나뉘어지는 슬픈 역사와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증언하고 있었다.

독일의 분단과 냉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 겉에서 보기엔 그저그런 것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놀라운 세계가 펼쳐진다.

박물관의 기록을 보니 베를린 장벽은 총 길이가 155km,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나눈 장벽이 43.1km, 동독과 서베를린 사이에 놓인 장벽이 111.9km였다. 금속으로 된 장벽이 66.5km, 감시초소가 302곳, 벙커가 20곳, 감시견 259 마리가 장벽을 지켰다. 장벽의 평균 높이는 3.6m, 폭은 1.2m였으며, 장벽 기단부의 폭은 2.1m였다.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장벽이 만들어진 1961년 8월13일부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9일까지 탈출 시도가 5075회에 달했으며, 탈출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455명에 달했다. 독일의 분단 이후 베를린 장벽을 제외한 동독과의 접경지역에서 사망한 사람은 1613명에 달한다.

박물관 안쪽에는 간디를 비롯해 비폭력 평화와 인권 향상을 위해 세계 각지에서 투쟁한 역사도 생생한 자료들을 동원해 되살리고 있었다. 실로 놀라웠다. 당시의 각종 문서와 사진, 동영상은 물론 탈출의 도구, 관련 예술작품, 신문 등 미디어 보도물까지 엄청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엄청난 박물관인 동시에 현대 역사 및 평화와 자유의 교육장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박물관이 라이너 힐데브란트라는 한 탁월한 인물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1914년 출생한 그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다음해인 1962년 한 아파트에 박물관을 열었다. 방 2.5개에서 박물관을 시작해 자료를 수집하고 키웠다. 소박한 출발이었지만 지금은 베를린이 자랑하는 페레가몬 박물관에 버금가는 연간 85만명이 찾는 박물관이 됐다.

힐더브란트는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한 사람들로부터 하늘에 띄우는 고무풍선과 탈출에 쓰인 자동차, 소형 잠수함 등을 기증받고 자유와 인권 향상,분단 해소를 위한 투쟁과 관련 자료, 그들의 스토리를 수집했다. 예술가들의 작품과 각종 행사의 포스터와 자료, 관련 뉴스가 실린 신문 잡지, 포스터도 모았다. 이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분단 한국의 처참한 고통과 분단 극복을 위한 처절한 투쟁이 잘 기록되고 있는지, 잘 관리되고 있는지 자문하게 됐다. 현재진행형인 우리 역사를 놓치는 것은 아닐까...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을 돌아본 다음 베를린 장벽을 찾았다. 해도 서서히 서녁으로 기울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은 격동과 슬픈 역사를 보여주듯 처연하게 서 있었다. 베를린 장벽 아래엔 장벽에 대한 역사나 스토리가 아니라 그 기원이 된 나치즘의 발원과 광기에 휩싸였던 부끄러운 역사를 역사를 재현해 놓고 있었다. 오히려 더 강한 슬픔과 비참함, 고통을 유발하는 듯했다.

베를린은 자신의 치부를 아프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기억의 태도가 독일의 저력을 만들고 있었다. 역사는 항상 기록하는 자가 승리해 왔다. 기록은 자신과 자신의 사회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독일이 과거의 비뚤어졌던 역사를 딛고 오늘날 이토록 강력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유럽연합(EU)을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힘이 거기에서 연유하는 듯했다.

베를린을 돌아보면서 역사교육을 홀대하는 한국과 자신의 부끄러운 침략 역사를 애써 외면하고, 심지어 미화하는 일본이 묘하게 교차됐다. 특히 침략국인 일본이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되돌아보지 않는 한 동아시아의 비극은 풀리기 어려운 숙제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이 주는 새로운 영감이 가족과의 헤어짐으로 인한 마음의 빈자리를 어느 순간 차지하고 있었다.

/hjlee@heraldcorp.com



<여행 메모>

여행기를 쓰고 있는 이해준 헤럴드경제 문화부장은 지난해 10월12일 한국을 출발, 아시아에서 유럽~남미~북미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희망찾기 세계일주’를 펼쳤습니다. 전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인 아내,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아들, 중학생 조카 등 5명이 시작한 이번 여행을 통해 이들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각자의 삶과 우리 사회의 새 희망을 찾았습니다. 때로는 우왕좌왕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면서 진한 가족애도 쌓았습니다. 삶의 목표를 확인한 사람이 하나씩 귀국해 마지막 여정에선 아빠 1명만 남게 되는 이들의 생생한 여행 이야기는 인터넷 카페 ’하루 한걸음(cafe.daum.net/changdonghee)’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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