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휴먼다큐> 정구호 디자이너 “패션은 마라톤과 같아…언젠가 ‘심야식당’ 차리고파”
[헤럴드경제=박동미 기자]“안경도 옷이잖아요.”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났더니 안경이 바뀌었다. 변함없이 ‘블랙 패션’이지만, 살짝 바뀐 옷차림에 안경도 맞춘 것. 디자이너 정구호(50)다. 그는 패션 대기업 제일모직 전무 직함도 갖고 있다. 대중에게는 ‘구호’라는 패션브랜드로, 또 지난해 김연아가 입은 평창동계올림픽 프레젠테이션 의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003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들고 제일모직에 입사했다. 이서현 부사장의 글로벌 패션 기업화 전략 선두에 서게 됐다. 국내 시장 매출 성장은 물론이고, 명품 시장을 겨냥한 컬렉션 의류 ‘헥사바이구호’는 뉴욕에 이어 파리까지 진출했다.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쌓아가면서 ‘외도’도 많이 한다. 무용극 감독에 건축물 프로젝트까지…. 지난 9월 파리 컬렉션을 마치고 돌아온 후 쉴 틈도 없이 친환경 캠페인 ‘비이커 프로젝트’에 돌입한 정 전무를 최근 신사동 호림아트센터에서 만났다.


#7분의 쇼 위해 7개월 준비…마라톤 같은 패션인의 삶은 ‘업보’=패션쇼는 길어야 10~15분이다. 그마저도 너무 긴 것 아니냐는 의견이 대두돼 최근엔 7분까지 줄었다. 이 짧은 순간을 위해 디자이너는 1년 365일을 쏟아붓는다. 봄ㆍ여름과 가을ㆍ겨울 컬렉션 두 번을 위해 각각 5~7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다.

“한 시즌이 끝나면 이미 다음 시즌을 구상하고 있어야 하죠. 7분을 위해 일곱 달을 투자하니까, 한 달 고생해야 1분이 나오는 건가요. 컬렉션 전 마지막 한 달은 거의 밤을 새워요. 오늘도 내년 2월 컬렉션 때문에 오전부터 회의를 했죠. 어느 직업이나 어려움이 많지만, 패션계 사람도 만나면 우스갯소리로 ‘전생에 죄를 지었다’며 웃곤 해요. 제게 패션은 ‘업보’예요.”


정 전무는 무엇보다 패션업이 “해도해도 늘지 않는 일”이라며 엄살 아닌 ‘엄살’을 부렸다.

“트렌드를 따라가고, 리드하고, 유지하는 일인데 오래 한다고 늘 수가 있을까요. 마라톤이죠.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조금이라도 뒤처지거나 발을 삐끗한다거나 하면 끝나버려요. 음, 이런 고민보다는 ‘업’을 바꾸는 게 더 합리적이죠.”

정 전무는 인터뷰 전날도 2~3시간밖에 못 잤다고 했다. 잠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잠깐 눈을 붙였다 뗀 거다. 지난 9월 파리 컬렉션을 끝내고 나면 잠시 쉴 줄 알았는데, 친환경 프로젝트 전시회와 브랜드 리뉴얼 등 일이 끊이지 않는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정 전무에 대해 ‘신비주의다’ ‘대기업 임원이라 제약을 받는다’ 등의 이야기가 있지만 ‘눈코뜰새없이 바쁘다’는 게 진실이다.

제일모직에서 맡고 있는 브랜드만 해도 5개가 넘고, 컬렉션 준비기간 틈틈이 무용ㆍ연극ㆍ영화ㆍ건축 등 ‘외도’도 많이 한다.

“외국 디자이너 친구가 ‘미쳤냐’고 해요. 사실 1년 내내 컬렉션 준비만으로도 벅찬 게 디자이너거든요. ‘뭐 그렇게 정신없이 사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좋으니까 하죠. 어떤 제안이 들어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거, 새로운 거면 도전해요. ‘디자이너가 왜 이걸 해?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하는 소리 들으면요? 투쟁심이 마구마구 생겨요. 더 잘하고 싶죠.” 


#1987년 뉴욕…‘패션’을 만나다=미국 텍사스 휴스턴대에서 광고미술을 전공한 정 전무는 1987년 세계적 패션명문 파슨스에 입학했다.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등 국내 패션계 곳곳에서 이 학교 출신이 활약하고 있다.

“텍사스는 시골이라 대도시 뉴욕에 오니 정신이 없었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자극은 학교였어요. 아직도 첫 날 수업을 잊을 수가 없어요. 강의실에 15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는데, 저랑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한 여학생 빼고 교수까지 모두 검은 색 옷이었어요. 이게 뭔가 싶었어요. 그 당시 미국 옷이 우리나라보다 색감이 너무 좋은 거예요. 개강날이랍시고 청바지에 특별히 구입한 화사한 빨간색 폴로 티셔츠를 입고 갔는데 말이죠.”

패션의 도시 뉴욕에서도 최고의 ‘스타일 고수’가 몰려있는 파슨스는 당시 ‘블랙 패션’이 점령하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분홍 원피스 여학생과 눈빛을 교환한 정 전무는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함께 검은색 티셔츠를 사 입었다고.

“재미난 건 그녀도 텍사스 출신이었어요. 그날 강의실에서 그야말로 우린 뉴욕에 온 ‘촌놈’이었던 거죠. 뉴욕은 별천지였어요. 제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패션세계를 접한 거죠. 그때부터 패션의 매력에 빠지고 디자이너를 꿈꾼 거 같아요.”

당시 이 학교 전체 학생 중 아시아계 학생은 14~15명 남짓. 정 전무가 졸업할 때는 7명쯤 남았다. 당시 함께 다녔던 한국 학생 중 가수 이현우가 있다. 지금도 아주 가끔 문자를 주고 받는다고 한다. 


#여동생 인형옷 만들어주던 소년…생애 첫 꿈은 피아니스트=어린시절 장래희망을 이루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루기는커녕 어른이 된 후에는 그게 뭐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은 꿈과는 다른 삶을 산다.

정 전무도 ‘첫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동생 인형옷을 만들어줄 정도로 옷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았지만, 정작 간절히 되고 싶었던 건 피아니스트였다고.

“아버지 반대에 그냥 취미로 피아노 치는 것조차 힘들었어요. 여동생이랑 같이 배우기 시작했는데 바이엘을 떼고 나니 ‘남자가 그거면 됐다’면서 아버지가 못 치게 하셨죠. 몰래 계속 배우다가 들켜서 엄청 혼났어요.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어서 ‘들키기 전에 빨리 배워놓자’고 생각하고 기본과정인 체르니 100번도 건너뛰고 재즈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결국 또 걸리고 말았죠. 아버지가 정말 엄한데, 두 번째 들켰을 때는 ‘아 정말 그만둬야겠다’고 마음을 다 내려놓았어요. 아니,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겠다고 하시잖아요. 그 한 마디에 ‘최종 항복’했죠.”

상처가 됐을 수도, 아버지가 야속할 법도 한데 정 전무는 ‘첫 꿈’을 포기하게 된 어린시절 기억을 오래된 추억처럼 담담하게 설명한다. 돌이켜보면 피아노를 만나고 헤어진 것도 패션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과정이다.

“음악 다음엔 미술이 좋았어요, 화가가 되려다 우여곡절 끝에 광고미술을 했고, 다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에 갔다가 패션에 눈을 떴죠. 과를 바꿀 엄두는 안 났고, 봉제 등 패션수업을 하나하나 청강하곤 했어요.”


#이거 정말 자네가 한건가?”…뉴욕 최고의 학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패션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을 위해 강연도 종종 하는 정 전무는 뉴욕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창의력 있는 학생이 한 곳에 모여서 열띤 경쟁을 벌이는 환경 그 자체가 ‘배움’이라고 말한다.

“파슨스에선 교수가 무작정 주제를 던져줘요. 나머지는 학생이 알아서 하는 거죠.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 ‘알아서 하라’는 답이 돌아오죠. 처음 3번 정도 과제를 못했어요. 도무지 방법을 몰랐으니까. 그러다가 주변 친구가 해오는 과제, 교수가 지적하는 이야기를 토대로 ‘아, 저거구나’하는 순간이 와요. 스스로 깨우쳐 가게 합니다. 그러면서 창의력도 생기고 성장하는 거죠.”

독특한 수업방식과 과제해결 방법에 적응한 정 전무는 이때부터 속도를 냈다. 네 번째 과제를 제출할 때 앞서 못한 3개의 과제물을 함께 낸 것.

당시 담당교수는 “이거 정말 네가 했느냐”며 “기한을 지켰으면 A+인데 지금은 B+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

패션디자이너를 희망하는 전 세계 ‘튀는’ 학생이 모인 ‘꿈의 학교’에서도 정 전무는 결코 뒤처지지 않았던 셈.

“그 분이 졸업 때 ‘함께 일하자’고 했는데, 제가 받은 첫 스카우트 제의이기도 해요.”

사실 파슨스는 지금 국내에서 인기몰이 중인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매일매일 심사위원(교수)의 혹평과 호평이 난무하는 곳이다. 잘하는 걸 잘하면 진부해지고, 새로운 걸 시도할 때는 몇 배로 잘해야 한다. 수업시간마다 “이게 디자인이냐, 갖다버려라”라는 교수의 악평에 울면서 뛰쳐나가는 학생도 많았다고. 수업방식이 요즘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인간미가 없다고 하자 “그게 승부의 세계 아니냐”고 되묻는다.

“취향과 판단은 다르죠. 교수의 평가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집니다. 아무리 예술 분야라지만 ‘전 이게 좋은데요’라는 말은 안 통해요. 수업시간마다 학생은 저마다 논리를 펼치지만, 결국엔 좋은 디자인이냐 아니냐는 미적 판단은 교수의 몫이죠. 자유로운 수업분위기와는 달리 평가는 엄격합니다. 아, 그래도 난 ‘갖다버려’란 소리 한 번도 안 들은 거 같은데?”


#영화ㆍ연극ㆍ무용…이번엔 친환경 건축 프로젝트=1998년부터 ‘정사’ ‘텔미썸딩’ 등 영화 의상디자인에 참여했던 정 전무는 이후 ‘스캔들’ ‘황진이’ 등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의상상을 수상했다. 무용에도 조예와 관심이 깊어 국립발레단의 실험 창작극의 각본도 쓰고 아트디렉터로도 활동했다. 지난 6월 최태지 국립발레단장, 안성수 안무가와 함께 탄생시킨 창작 발레극 ‘포이즈’는 평단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호응이 높았다. ‘덕분에’ 바쁜 와중에 ‘일감’이 하나 더 늘었다. 이번엔 한국전통무용이다. 국립무용단의 제안으로 내년 4월 국립극장 무대에 공연을 올릴 예정이다.

패션브랜드 ‘구호’의 소각대상 재고품으로 오브제를 만들어 전시하듯 친환경 프로젝트를 간간이 시도했던 정 전무는 이번에는 건축으로 눈을 돌렸다. 최근 론칭한 편집숍 ‘비이커’를 통해 “말뿐이 아닌 친환경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요즘 친환경을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다들 흉내만 내는 것 같아요. 저도 뭐, 친환경과 거리가 먼 패션업에 종사하곤 있지만…. 매장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면서 생기는 쓰레기. 이거라도 좀 없애보자는 의미에서 재활용품으로만 이뤄진 소비공간 ‘비이커’를 만든 거죠.”

비이커는 옷걸이만 빼고 전부 재활용품이다. 철거대상 건물에 가서 필요한 자재를 모았다. 버려진 자개장 등 내부도 폐가구를 재조립해서 꾸몄다. 책도 판매하지만 모조리 중고제품이다. 기증을 받기도 하고, 물물교환도 이뤄진다. 매장에선 이 모든 것이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영상이 방영돼 방문자를 ‘친환경적 삶’에 동참하도록 독려한다.

“이런 노력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언젠가 친환경 제품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시대가 오겠죠. ”

이날 정 전무는 서울대 모아미술관에 ‘비이커 프로젝트’와 관련한 강연을 간다고 했다. 자주 젊은이와 교류하고, 학생 앞에 나서는 일도 정 전무의 중요한 스케줄 중 하나다.

“내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 강연은 제게도 이점이 있어요. 젊은 사고를 유지하는 데는 젊은이를 만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죠. 저는 학생에게 질문도 많이 해요. 학생 대상 강연은 가능하면 거절하지 않는 편이죠.”


#인생의 최종 목표는 ‘역사가 평가해주는 삶’…신진디자이너 양성은 의무와 책임=정 전무는 역사가 기억해주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 그는 이미 패션계와 다양한 문화 분야에 수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이 정도면 살다간 흔적 많이 만든 것 아니냐고 묻자 “진짜 평가는 죽은 다음에 있는 법”이라고 말한다.

“정확한 평가는 제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오겠지요. 제가 한 모든 일의 과정, 결과, 의미 등등. ‘정구호라는 사람이 있었고, 이런저런 일을 했는데, 그래도 조금은 기여를 했다’는 정도면 족할 것 같아요. 죽는 순간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크건 작건 하고 싶은 일, 결심한 일은 반드시 다 해보려고 해요.”

브랜드 ‘구호’는 유럽의 명품 브랜드처럼 키우고 싶다. 단순히 비싸고 품질 좋고 아름다운 옷이 아니라 몇 세대를 거쳐도 기억되는 그런 브랜드가 되었으면 한다.

“제가 없어도 ‘구호’가 영원히 이어져 시대와 세대를 아우를 수 있었으면 해요. 아직 우리나라에 패션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우지 못한 건 대를 이어 내려가는 브랜드가 없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신진디자이너 양성은 이 땅의 디자이너에겐 의무입니다.”

국내 대표 패션기업의 전무이자 뉴욕과 파리에 모두 진출한 국내 대표 디자이너로서 그가 느낄 책임감은 어마어마할 터. 그런 면에서 지난 봄부터 국내 최대 패션축제라고 일컫는 서울패션위크에서 정 전무의 컬렉션이 사라진 게 아쉽다.

“국내 고객을 위해 서울패션위크 같은 큰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죠. 개인적으로도 영광이고요. 하지만 지금의 패션위크는 제가 지향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노력과 투자가 이어지고는 있지만, 해를 거듭해도 크게 개선되지 않는 부분이 아쉽고 안타깝죠.”


#요리, 가장 좋은 친구이자 유일한 취미…어쩌면 가장 큰 꿈=‘구호’를 글로벌 명품 브랜드로 만들고, 후학 양성에도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정 전무에게는 소박한 꿈도 하나 있다. 이는 그의 독특한 이력이 말해준다. 바로 요리다.

그는 1986년 르꼬르동블루대학교 시드니에서 프랑스 요리와 페스추리 연구과정을 수료했다. 정 전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다. 이제 패션은 ‘숙명’이고, 요리는 ‘꿈’이라고 부르면 좋을 듯 싶다.

“영화 ‘사브리나’에 보면 오드리 헵번과 함께 요리를 배우는 백발의 노인이 있어요. 영화지만, 그 나이에 요리를 배우는 열정도 멋지고 하얀 머리도 좋아 보였어요. 나도 저렇게 은퇴 후엔 맛있는 요리를 해먹고, 식당도 차려보면 좋겠다 하고 배웠어요.”

정 전무의 요리실력은 패션계에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냥 취미 정도가 아니라 수준급이라는 것. 학교를 다닌 프랑스 요리는 물론이고, 이탈리아와 한ㆍ중ㆍ일식, 태국, 베트남 음식까지 못하는 게 없다. 가장 잘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도 “다 잘한다”고 답할 정도다. 요리 마니아답게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요리 관련 콘텐츠는 거의 섭렵했다.

“만화 심야식당 보셨어요? 주인장이 왕이잖아요. 그런 식당이라면 한 번 차려보고 싶어요. 음…메뉴는 ‘노메뉴’. 제 마음대로 만들고, 손님이 짜다고 하면 “내 기준이야, 먹지마”라고 말해도 괜찮고….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곳에 이런 식당 하나 숨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pdm@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