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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백명 조선통신사의 하루하루를 엿보다
타야할 배 놓쳐 일정 어긋나고
더 좋은 가마 타려 쟁탈전도…
통신사들 수천리 여정 생생히

임진왜란 ‘징비록’도 日서 간행
단속 불구 서적 밀무역 성행
일본 지적열망 속 출판문화 태동


우리나라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밖에 와서 보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보았다. 물어보니 그는 전라도 태인 사람으로서 성명은 최가외이고 나이가 지금 74세였다.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포로가 됐는데 그 부모는 다 죽고 처와 네 누이동생도 모두 포로가 되었다. 일본에 온 뒤 아들과 손자를 낳고, 남의 종이 되어 신을 팔아 생활했다고 말했다.”

1655년 조선통신사로 사행한 남용익의 사행록 ‘부상일록’ 9월 9일자 일기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로 건립한 막부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조선에 사행을 요청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이 복수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져 있었기에 민심안정에 도움이 될 거란 판단에서였다. 조선 역시 임진왜란 정유재란 같은 전란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일본의 동태를 살피고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회유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정치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문화사절단 조선통신사는 1607~1811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열두 차례 이뤄졌다.

김경숙 교수가 쓴 ‘일본으로 간 조선의 선비들’(이순)은 기존에 조선통신사를 조명한 책들이 공식적인 활동에 주목한 것과 달리, 이들의 소소한 일상에 주목했다.

사행길은 부산을 출발해 쓰시마를 거쳐 에도까지 왕복하는 수천리 여정으로, 470여명이 움직이다 보니 배를 갈아타는 일부터 숙소 정하기까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부산을 출발해 일본 내해 항해를 거쳐 오사카 하구에 도착한 사행원들은 일본의 금루선으로 갈아탔다. 11척의 금루선은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지어졌으며 뱃머리, 꼬리, 좌우 난간에 모두 금으로 꽃이나 용, 학으로 장식하는 등 화려했다. 사행원들은 각자 정해진 배에 타야 하지만 워낙 인원이 많다 보니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타야 할 관서선을 놓쳐 일정이 어긋나는 사례도 종종 생겼다. 1척의 금루선 앞에는 가람선 6척이 3척씩 두 줄로 앞서가 장관을 이뤘다.
 
그림은‘ 조선통신사 환대도 병풍’으로 도우운마스노부 교토 센뉴지 소장. 1655년 에도에서 조선통신사가 국서를 전달하러 가는 모습을 그린 병풍 가운데 가마를 타고 가는 정사의 모습이다. 가마가 몹시 화려하고 여덟 명이 메고 있다. 일본에서는 견여를 중요하게 여겨 천황과 간파쿠만이 견여를 타고 그 외에는 감히 타서 앉아 있지 못하는데, 이를 삼사에게 내어준 것은 그만큼 최고의 대우였음을 알 수 있다.

400명이 넘는 사행원들이 잘 관소는 주로 사찰 몫이었다. 동서 102칸, 남북 109칸을 지닌 도쿄의 히가시혼간지도 1711년 이후 조선통신사의 관소로 사용됐다. 당시 히가시혼간지는 통신사행을 다 수용할 수 없어 경내에 임시로 가옥을 설치해 하관들을 들였다. 방 배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사행원들은 배정된 처소에 얌전히 들지 않았다. 사행선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각자에게 배정된 방을 서로의 묵인 아래 자주 바꿨다. 친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같은 방을 쓰고 싶은 건 인지상정. 먼저 도착한 사람이 스스로 편한 곳을 차지하고 누구의 처소로 적힌 방패를 바꿔 걸었다. 현교란 가마를 타는 일도 간단치 않았다. 일본인보다 체격이 큰 조선의 선비들은 허리를 굽히고 앉아 있어야 했다. 더 좋은 가마를 타기 위한 가마쟁탈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행길이라도 생일은 챙겼다. 배에서도 조촐하게나마 생일상을 차렸는데, 1764년 5월 11일 김인겸은 생일 아침, 손님을 대접하고 떡도 돌렸다. 요즘과는 달리 생일에 송편을 먹은 게 특이하다.

사행길에는 차와 간단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태수가 이용하는 차야라 불리는 요즘 식의 휴게소을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통신사들이 일본 여성을 직접 만나는 일은 없었다. 계미사행에 서기로 참여한 원중거가 멀찍이서 바라보며 각 지역 여성을 평가했다. 원중거는 나고야의 여인이 가장 자색이 뛰어나다고 점수를 주면서도 교토의 여인들은 “요염하고 어리석으며 예쁘고 연약함이 마치 부처 같고 신 같다”며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교토의 황족이 아니라 나고야의 태수집안의 여성들에게 높은 점수를 준 것은 관리 집안의 적당한 화려함에 손을 들어준 것이라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원중거의 기록에는 시장통에서 베를 짜고, 배 만드는 곳에서 자귀질하는 여인 얘기도 나온다. 18세기 후반 일본의 수공업과 시장경제의 태동을 보여준다.

저자가 사행록을 통해 일본에서의 조선 책 유통과정을 살핀 점은 새롭다. 1711년 부사 임수간의 사행록 ‘동사일기’에 따르면 일본인이 당시 읽은 조선 서적으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가 등장한다. 조선의 근간이 되는 ‘경국대전’, 유성룡이 지은 임진왜란 기록인 ‘징비록’도 일본에서 간행돼 읽혔다. ‘징비록’은 우리나라 간행본과 달리 상세하게 그려진 조선도와 조선의 군, 주, 부, 현의 이름과 수가 자세히 적힌 도표가 들어있다. 조정에선 서적의 유출을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숫자는 늘어갔다. 역관의 밀무역 때문이었다. 반대로 조선에서는 일본 서적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일본의 지적 열망과 달리 조선은 일본을 정확히 알지 못했고, 일본서적에 대한 갈망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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