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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어서 지구 한바퀴…이해준의 ‘희망가족’> 유라시아 대륙의 끝에서…희망의 첫발을 내딛다
<24> 포르투갈 로까곶
눈앞에 펼쳐진 대서양 망망대해 보며
좌충우돌 여정 떠올라 왠지모를 뿌듯함이

화려한 문화유적·장엄한 자연 없었지만
내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한 곳
아들과 속 얘기 나누며 소중한 시간보내


[신트라(포르투갈)=이해준 문화부장] 까보 다 로까(Cabo da Roca). 세계에서 가장 큰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땅끝마을 로까곶의 포르투갈 이름이다.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이어온 여정이 아시아와 유럽을 횡단해 대륙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가족 모두 건강했지만, 반 년을 훌쩍 넘긴 장기여행으로 알게 모르게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붙어다니는 데 따른 스트레스도 차곡차곡 쌓였다. 그래서 스페인 여행이 끝나갈 무렵, 여행의 변화를 시도했다. 가족을 두 팀으로 나눈 것이다. 일주일 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필자와 둘째 아들은 포르투갈로, 아내와 첫째는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했다.

필자와 둘째아들은 마드리드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하는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국경을 넘어 10시간 정도 달린 끝에 다음날 아침 리스본에 도착했다. 하루 종일 시내와 조르제 성 등 명소를 돌아다닌 다음 둘째날 로까곶으로 향했다.

로까곶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거나 유명한 역사 또는 문화유적이 있는 곳이 아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끝이라는 상징적 의미 외에 특별히 볼거리가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로까곶으로 향하면서 왠지 모를 흥분이 몰려왔다. 드디어 땅끝까지 왔구나 하는 뿌듯함과 성취감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낭만과 모험, 험난함이 교차했던 그동안의 여정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엄청난 여정이었다. 정세가 불안한 중동지역을 우회하기 위해 인도 뭄바이에서 터키 이스탄불을 항공기로 이동한 것을 제외하면, 육로와 해로로 거대한 대륙을 횡단했다. 그것도 현지인이 이용하는 대중교통만 이용했다. 36시간 기차를 타기도 했고, 야간열차와 야간버스 타기를 밥먹듯이 했다. 숱하게 헤매고 좌충우돌했지만, 한걸음 한걸음 내디뎌 결국 여기까지 온 것이다.

리스본에서 로까곶 여행의 기점인 신트라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기차로 40분 정도 걸렸다. 신트라는 대서양 연안의 전략적 요충지로 멋진 유적 두 곳이 있었다. 8~9세기 북아프리카 무어인이 건설한 모루스 성과 19세기 스페인 낭만주의 건축물의 정수를 보여주는 페나 궁전이었다. 두 곳을 돌아본 다음, 로컬(지역)버스를 타고 로까곶으로 향했다.

로까곶으로 향하는 버스 창밖으로 고즈넉한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한국의 동해안과 제주도의 해변마을을 합한 것 같은 평화롭고 정겨운 모습이었다. 아직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서 그런지 길은 구불구불하게 이어졌고, 1차선으로 된 곳도 있었다. 버스는 마을 안쪽에 난 좁은 길을 통과하기도 했는데 반대 편에서 차가 오면 교차할 수 있는 곳으로 비켜 서 있어야 했다.

40분 정도 달려 로까곶에 도착했다. 이곳이 대륙의 서쪽 끝임을 알리는 간판과 도로 표지판, 꼭대기에 십자가를 얹은 탑이 서 있었고, 저쪽 편에는 등대가 있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에 몸을 바짝 낮추어 땅에 붙다시피 자란 풀과 관목이 우거진 작은 정원 곳곳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여행자가 환호성을 지르며 땅끝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대륙의 끝에 도착한 것이다. 탑에는 북위 38도47분, 서경 9도30분이라는 방위 표시와 “여기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포르투갈 서사시인 까몽이스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깎아지르는 절벽 아래에선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하염없이 부서졌고, 거기서부터 대서양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높이가 140m에 달하는 절벽은 언뜻 보기에도 아찔했다.

로까곶 오른쪽에는 등대가, 왼쪽에는 해안선과 맞닿은 절벽 위로 좁은 길이 나 있었다. 둘째 아들은 여행자와 함께 바위를 타고 그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절벽 아래만 구경하고 돌아오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혼자서 건너편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또 올랐다. 조그만 점으로 변해 보일락말락할 때까지 절벽을 오르내리며 대륙의 끝을 탐험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인 포르투갈 로까곶. 약 140m의 절벽 위에 대서양을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고, 이곳이 대륙의 끝임을 알리는 탑 너머로 대서양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다.

사람들은 표지석과 대서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특별한 관광꺼리도 없고 바다도 아무말 없이 바위에 부서졌지만, 사람들은 여기 온 것 자체만으로 감동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도 대륙의 끝에 온 감회가 남달랐다.

환호하며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을 보면서 이곳이 과연 ‘대륙의 끝’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지리적으로 대륙의 끝은 분명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바로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며, 신대륙으로 향하는 출발점이었다.

많은 사람은 이곳에 와서 “우리는 대륙의 끝을 보았다”고 환호하며 돌아섰지만, 어떤 사람은 이곳이 새로운 출발점이라며 망망대해를 향해 희망의 닻을 올리고 배를 띄웠다. 그 배를 띄운 사람이 새로운 역사를 만든 것 아닌가. 포르투갈 전성기인 15~17세기 ‘대항해 시대’를 연 엔리케 왕자나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 단계, 한 고비를 너머 앞으로 나갈 때 더 성숙해지고 더 높은 단계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한 곳에 머문다면 그것은 정체일 뿐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자신감이 충만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 현실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여행의 진정한 목적이다. 로까곶이 우리 삶과 우리 가족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로까곶을 돌아본 다음 기념품점에서 25유로(3만7500원)짜리 기념 티셔츠를 하나 구입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한참 달려 까스까이스로 돌아오니 이미 해가 서쪽으로 거의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곧바로 리스본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에서 둘째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지금 여행을 계속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든지, 외국에서 영어공부를 하든지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왜냐고 물으니 “남미도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고졸 검정고시와 대입을 준비하는 게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며칠 동안 앞으로의 여행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둘째에게도 깊이 생각해보라고 했는데, 나름대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둘째아들은 한국을 떠나 세계를 떠돌기 시작한 지 벌써 9개월이 됐다. 그는 고교를 중단하고 2개월여 동안의 어학연수에 이어 홍콩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입시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고3 친구와 헤어져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여행이 좋아 부모와 함께 대장정에 나섰지만, 지금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새롭게 깨달은 것 같았다.

아들의 결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아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지나갔지만 아빠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지금 아들은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갖기 어려웠던 대화였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것 아닌가.

리스본의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 아들은 영어로 일기쓰기를 시도하면서 끙끙거렸다. 처음이었다. 그러느라 단어를 몇 차례 물어보더니, “매일 일기를 쓰겠다”고 말했다. 스스로 변화하려는 것이었다. 부모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마음을 먹고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수백 번 강조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을, 결국 여행이 가져다 주는 것 같았다.

로까곶 여행은 다른 어떤 엄청난 문화유적이나 장엄한 자연경관 못지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우리 내면에 웅크리고 있지만, 실체를 알기 어려운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곳, 자신에 대한 성찰을 가져다 주는 곳, 그래서 모종의 변화를 일깨워주는 곳, 삶의 새로운 희망을 주는 곳, 그곳이 로까곶이었다. 로까곶은 땅의 끝이 아니라 바로 그런 희망의 출발점이었다.

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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