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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돌아온 육근병,‘19세 소녀의 눈’으로 도시를 휘감다
[헤럴드경제= 이영란 선임기자]“한동안 국내 활동이 뜸했더니 제가 죽었다고 소문이 났어요. 거 참 기분 묘하더군요. 그래서 돌아왔죠. 멀쩡한 사람을 산 송장으로 만들었으니 ‘쎄고 강력한 작업’으로 답하고 싶습니다”

한동안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비디오 아티스트 육근병(55)이 돌아왔다. 국내 전시는 14년 만이다. 그가 서울 광화문의 일민미술관(관장 김태령) 1~3층에서 대규모 컴백쇼를 연다. 오는 19일 개막되는 전시에는 오디오비디오 설치작품과 드로잉, 퍼포먼스 영상 등 다채로운 작품이 나온다. 그의 족적을 살필 수 있는 입체적인 아카이브도 꾸며진다.


육근병은 1989년 상파울로비엔날레, 1992년 카셀도쿠멘타9, 1995년 리옹비엔날레에 초대받는 등 글로벌스타로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세계 아티스트들의 ‘꿈의 무대’인 카셀도쿠멘타 참가는 그에게도, 한국미술계에도 큰 분수령이 됐다.

육근병은 카셀의 메인전시장인 프리데리시아눔 미술관 앞에 거대한 초분과 철기둥을 만들고, 빔 프로젝터로 껌뻑이는 눈(eye) 영상을 서로 마주치게 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각국에서 ‘놀라운 작품’이란 찬사가 쏟아지며 전시 제의가 빗발쳤다. ‘백남준을 이을 재목’이란 호평도 이어졌다. 그러나 큰 명성은 외려 딜레마가 됐고, 육근병은 이후 심한 성장통을 앓았다. 1998년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 후 그는 한동안 ‘잊혀진 작가’가 됐다.


그는 말한다. “워낙 힘있는 공간에서 연속적으로 큰 판을 벌이다 보니 피로감이 찾아왔다. 쉬어가고 싶었다. 게다가 작은 공간에서의 대처가 미숙했다”고. 또 수년간 올인했던 뉴욕 UN본부에서의 매머드 영상쇼가 9.11사태로 무기연기되면서 더욱 진이 빠졌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났다.

‘Videocracy’(비디오에 의한 정치)라는 부제 아래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최근 제작한 흥미로운 신작들이 다수 출품됐다. 경기도 양평 산자락에 피어난 이름모를 들꽃 12가지와 일본 아오모리 지역의 평범한 주민 12명(9세 19세 29세 39세 49세 59세 남녀)의 영상을 기다란 나무박스에 집어넣은 뒤, 미술관 공중에 매단 ‘Transport(2012)’는 생명의 오묘함을 다룬 작업이다. 미술품 운송용 나무박스(crate)에 담긴 두쌍의 영상은 에너지가 다른 도시를 오가면서도 그 생명력을 오롯이 뿜어내고 있다.


바람을 받아 무심히 나부끼는 흰색의 무명천을 찍은 영상물 ‘Nothing(2012)’도 정지된 화면과 화면 사이에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새겨넣는 ‘육근병식 예술’이 잘 살아난 작업이다.

이같은 작업은 아주 작은 미물이며, 소솔한 바람결,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야말로 우주의 근본임을 나직히 들려준다. 낮고 보잘것 없는 것 속에 어쩌면 생(生) 전체를 관통하는 심오한 철학이 깃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말(대재앙)을 뜻하는 ‘아포칼립스(Apocalypse)’도 육근병에겐 세상의 끝이 아니라 한 ‘생(生)의 씻어냄’이 되고 있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명동 도심에서 찍은 사람의 발걸음을 거꾸로 돌린 화면과 물의 흐름을 보여주는 ‘Apocalypse(2012)’는 시간의 거스름을 통해 존재의 구원을 천착한 작품이다.

또 폭탄이 터지며 불꽃이 이는 장면을 초고속카메라로 촬영한 뒤 이를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Messenger’s Message(2002-2012)’와 종군위안부를 담은 다큐멘터리 ‘훈 할머니’도 소개된다. 예술가가 사회및 대중과 새롭게 소통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작품이다. 


지난 1995년 리옹비엔날레에서 발표됐으나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Survival is History(1995)’는 광화문 사거리에 놓여져 저녁마다 그 커다란 눈으로 서울시민을 휘감게 된다. 눈이야말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가장 진솔한 창구라 믿기에 그는 앞으로 ‘눈(eye)’ 작업을 더욱 확대시킬 예정이다.

우선 내년 뉴욕 UN본부 외벽에서 대규모 설치프로젝트를 시행한다. 세계 193개국 어린이들의 눈을 모자이크해 벽면에 투사하는 영상작업으로, 발주받은지 10여년 만에 드디어 실현하게 됐다.

육근병은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이를 영상및 설치로 스펙터클하게 보여주는 작가다. 그의 작품 속에 담긴 삶, 또는 생명의 순환고리는 ‘한(恨)과 업보’에 대한 육근병의 남다른 성찰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그 한(恨)은 부정이 아닌 긍정의 시선이란 점에서 돋보인다. 전시는 12월 9일까지. 월요일 휴관. 성인 2000원, 청소년 1000원. 사진제공 일민미술관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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