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종이 있다면 인간이라는 종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문화사에 관한 흥미로운 글쓰기를 보여주는 저널리스트이자 문화사가인 스튜어트 월턴은 ‘인간다움의 조건’(사이언스북스)에서 감정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월턴은 다윈이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 대하여’(1872)에서 밝힌 인간의 기본 감정인 행복ㆍ슬픔ㆍ분노ㆍ공포ㆍ혐오ㆍ놀람에 더해 질투ㆍ경멸ㆍ수치ㆍ당황의 네 가지 감정을 포함시켜 개별 감정이 처음 시작된 기원에서부터 국가나 각종 매체가 감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조작하는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감정이 어떻게 인간사회에 영향을 끼쳤는지 광범위하게 살핀다. 인간의 문화사를 통해 감정의 문화사를 살핀 새로운 시도다.
공포와 불안은 인간의 먼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프리카 초원을 가로지르던 때, 자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원초적 감정이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지자 더 큰 두려움의 대상은 전능한, 초월적 존재로 바뀐다. 내세에 대한 두려움, 영원히 벌을 받는다는 두려움, 결국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존재론적 두려움, 권력 앞의 두려움까지 인간은 여러 형태의 두려움 앞에 본능적으로 위축되고 변연계에 각인된 이상 신호를 따라 육체는 반응한다. 이런 감정은 외부의 권력에 쉽게 이용되기도 하지만 지속되는 두려움은 분노로 바뀔 수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아버지로부터 예닐곱 살 때부터 온갖 구타와 욕설을 당한 프리드리히 대제는 공포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예다. 심지어 감금까지 당하면서 버림받은 프리드리히가 약소국 프로이센을 유럽의 패권국으로 도약시킨 주인공이란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런 그에게 공포의 대상은 옷과 물이었다. 새옷은 어렵게 쌓아올린 자신의 모습이 바뀔까 봐 두려워 입지 못했고, 물도 비슷한 이유로 거부했다.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은 역사ㆍ문학ㆍ예술ㆍ철학을 아우르며 적절한 스토리로 각각의 감정을 다층적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데 있다. 저자는 10개의 감정에 하나의 장을 할애하면서 감정의 기원과 발달, 역사적 주요 사건, 오늘 시점에 시사하는 바까지 한 두릅으로 꿰어낸다. 저자는 감정을 단순히 생물학적 현상으로 단순화하지도, 잡히지 않는 모호한 정신의 이상 심리로 몰아가지도 않는다.
분노의 감정 역시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바라보는 시각이 변해왔다. 기원전 5세기께부터 오랫동안 분노는 제어해야 할 감정으로 여겨졌다. 기독교의 윤리 사상에서도 분노는 사람을 천하게 만들어 그것을 느끼는 사람을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뜨린다고 봤다. 빅토리아 시대에 오면 분노를 바라보는 시선은 좀 너그러워진다, 1840년대 가톨릭교의 고위 성직자로, 옥스퍼드대 학감을 역임한 헨리 매닝 추기경은 “분노는 정의를 집행하는 힘”이라고 했다. 불의를 바로잡는 분노의 건설적인 역할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참정권을 비롯한 서양 사회에서 이뤄진 발전은 예외 없이 분노의 거센 분출을 통해 이뤄졌다.
저자의 세심한 탐색은 경멸의 본능에서 보다 빛을 발한다. 민주주의는 경멸의 보편화라는 것, 즉 봉건제에서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경멸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피지배자가 지배자를 경멸한다.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영국에서 에티켓이 발달한 것도 경멸과 관련이 있다. 부를 거머쥐고 무섭게 상승하는 부르주아에 두려움을 느낀 귀족들이 그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자기들끼리만 알아보는 복잡한 기호를 만들어낸 결과란 설명이다. 두려움과 경멸, 권태로 이어지는 통찰도 날카롭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개념을 빌려와 사적인 감정의 적당한 공적 표출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한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적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 해소시켜야 할 대상이지만 집단적 표출은 억압한다. 이런 억압된 감정은 영화나 TV 드라마, 공개적 애도 등으로 대리 표출되곤 한다.
개인의 인격에서 모자라는 대접을 받아온 감정이 월턴에 의해 적당한 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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