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도 식당은 출세의 상징
중세부터 20세기까지 명화 분석
벽걸이 천·화덕·장식장·욕실 통해
중세·근현대 사회 생활문화사 복원
그림은 일종의 시(詩)일 수 있다. 화가가 무심히 그려넣은 장식은 하나의 기호 혹은 상징으로 작용하며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도 하고 시대의 삶과 문화, 역사적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모로코 출신의 시인이자 도상학자인 베이트리스 퐁타넬은 ‘살림 하는 여자들의 그림책’(이봄)을 통해 중세부터 20세기까지 명화 속 여인들이 활동하는 공간, 실내를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침실과 부엌, 실내장식, 조명, 창, 방, 식당, 욕실 등 주거공간들을 꼼꼼히 훑어가며 우리가 모르는 중세와 근현대 사회의 일상을 복원해낸다. 저자가 주목한 그림 속 주인공은 다름 아닌 살림 하는 여성이다. 커텐과 그릇, 화덕, 빨랫감 등 자질구레하게 보이는 일상의 파편들이지만 이를 조각조각 이어붙여 그는 인류문화사의 품 넓은 패치워크를 완성해 보인다.
윌리엄 맥그리거 팩스턴의 그림, ‘아침신문’에는 철제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여성이 있다. 아무 장식이 없는 칙칙해 보이는 방이지만 여인은 평온해 보인다. 침실이 잠을 자고 혼자 있고 싶을 때 쓰는 개인적인 공간이 된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제목대로,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 20세기에나 가능했다. 철제 침대의 유행은 당시 가장 흔한 병인 결핵 방지용이었다. 중세의 침대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동방의 영향으로 화려해지고 커진다. 침대의 폭이 넓어지긴 했지만 길이는 일부러 늘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몸을 완전히 쭉 펴고 자는 것이 시체 같다 해서 기피했기 때문이다.
17세기까지는 한 방에서 여러 개의 침대를 두고 주인과 하인, 부모와 아이들이 지냈다. 이는 상류층도 마찬가지였다. 침실문이 닫힌 것은 18세기 프티 부르주아가 탄생하면서부터. 이들의 꿈인 사교공간 살롱의 탄생과 함께 침실은 은밀해졌다.
가족의 하루 양식을 만들어내는 요리를 할 수 있는 부엌과 조리용 화덕이 생긴 것은 19세기 말에나 가능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요리를 한다는 것은 즉석에서 야영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바닥이나 의자 위에 채소들을 올려놓고 작은 화로에 그릇을 얹어 요리하는 게 다였다. 아궁이가 하나밖에 없는 조촐한 집들은 빵집에 고기를 보내 구워달라고 부탁했다. 빵집의 화덕에서는 약 50여 가정의 저녁식사가 함께 익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 캔버스 그림으로 벽을 장식하기 전, 집안의 벽을 꾸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크리스틴 드 피잔의 책 ‘고귀한 부인들의 도시’의 채색삽화 중 ‘이자보 드 바비에르 여왕에게 책을 바치는 크리스틴 드 피잔’을 보면, 백합꽃 장식이 되어 있는 벽걸이 천이 벽면을 꾸미고 있다. 이는 태피스트리로 대체되면서 가구가 등장하는 18세기 말까지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일반 가정집에서 벽에 그림을 걸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다. 19세기 영국 사업가였던 로버트 고든의 식당을 그린 조셉 시모어 가이의 ‘꽃다발을 둘러싼 싸움, 살롱 안에 있는 로버트 고든 가족’에는 벽면 가득 크고 작은 그림 액자들로 가득하다. 어두운 빛깔의 두꺼운 터키산 양탄자, 묵직한 커튼, 르네상스 양식의 장식장 등 그 시절 트렌드가 보인다.
그림 속 일상의 물건들을 통해 중세부터 20세기까지 일상의 표정을 풍속사 등 각종 문헌과 문학작품을 관통하며 읽어냈다. 그림은 프랑수아 에셍의‘ 몸단장 하는 젊은 여인’(18세기, 아베빌 부셰 드 페르트 박물관 소장). |
루이 폴 데사의 그림 ‘클로틸드’는 밝은 햇살이 환한 화분이 놓여 있는 창가에 서서 여인이 뜨개질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유리란 꿈도 꿀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유리판이 나온 것은 17세기 중반께로, 중세에는 유럽에서 생산된 거의 모든 유리판은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만드는 데 들어갔다. 실내 환기라는 개념은 19세기에서야 위생주의 의사들이 벌인 캠페인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식당이 독립된 방으로 존재한 것은 19세기 초의 일이다. 15세기 채색삽화를 보면 가장 부유한 집조차 그릇이나 수저가 많지 않았다. 16, 17세기 지체 높은 귀족과 귀부인들도 음식에 손을 대고 먹었다. 19세기 말이 되면 식당은 사회적 출세의 상징으로, 실내장식이 우선시되는 화려한 공간으로 바뀐다.
프랑수아 에셍의 ‘몸단장을 하는 젊은 여인’(18세기)은 욕실을 그리고 있지만 얼핏 보기에 보통 규방처럼 보인다. 구석에 작은 도자기 대야와 비데가 놓여 있다. 당시 점잖은 사람들은 비데를 자기로 만든 바이올린 케이스라 부르기도 했다. 일반 규방이나 살롱과 다름없던 프랑스식 욕실은 미국의 영향을 받아 잠수함의 기계실, 외과수술실처럼 바뀌어 나간다.
도상학자의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문화와 역사를 아우르며 풍성한 삶의 표정을 그려내 명화와 함께 즐기는 생활문화사로 손색이 없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