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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움의정원’ 주제 부산비엔날레,배운다는건 오히려 비운다는 것
‘비엔날레’라는 이름에 걸맞는 근사한 조형물을 기대했다면 ‘2012 부산비엔날레’는 그 기대를 첫술부터 배반한다. 관람객을 맞는 건 시커먼 가림막이 드리워진 전시관이니 말이다. 22일 개막된 부산비엔날레는 주(主)전시관인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의 부산시립미술관은 공사장처럼 비계와 가림막으로 둘러싸여졌다. 관람객은 ‘아, 뭐지? 공사 중이잖아. 잘못 찾았군’하고 발길을 돌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공사장을 연상케 하는 공간 연출은 곧 이번 비엔날레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가림막과 비계는 미술관 내부에도 끝없이 이어지며 올 부산비엔날레가 추구하는 컨셉을 드러낸다. 그것은 예술이란 게 꼭 번쩍번쩍 휘황찬란해야 하는 것이냐, 어깨의 힘 빼고 고정관념과 관습을 벗어던진채 새로운 걸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묵언의 발언이다.

▶예술로 ‘새로운 문턱’ 만들기=‘배움의 정원(Garden of Learning)’이란 주제로 닻을 올린 올 부산비엔날레는 시작부터 끝까지 부산시민과의 협업을 통해 이뤄졌다. 배움위원회라는 오픈포럼 형태의 기구가 만들어져, 수십회의 토론과 공동작업을 통해 비엔날레가 완성된 것.


시민ㆍ참여작가ㆍ감독 등 80명으로 이뤄진 배움위원회는 한국사회 및 정치 구조, 부산의 다양한 층위, 예술의 방법론을 느리지만 긴밀하게 논의하며 자기주도적 교육을 펼쳐갔다. 배움위원이었던 부산 동천고 3학년 박세희 군은 “처음엔 뭘 해야 할지 몰랐고, 짬뽕이 될까 봐 걱정이 많았다. 미술은 높은 사람, 지식인만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깨졌고 그 의미를 재인식하게 됐다”고 했다.

독일 출신의 로저 M. 뷔르겔 전시감독은 “유럽서 온 예술감독으로서 나 역시 한국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했다. 배움이란 무지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배운 것을 비우는 과정도 포함한다. 비워야 새로운 걸 넣을 수 있다”며 “기존의 관습과 도식적인 방법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턱을 만들고자 했다”고 했다. 따라서 올 비엔날레는 예술은 원 웨이(one way)가 아니라 투웨이(two way)이며, 협업을 통해 흥미로운 정서적 관계가 창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도발적, 전복적인 비엔날레=올해 부산비엔날레는 대단히 가변적이고 유기적이다. 작품들은 매끄러운 화이트 큐브에 내걸린 게 아니라, 바퀴가 달린 금속지지대(비계) 또는 잿빛 가림막 위에 내걸렸다. 액자에 끼워졌던 작품도 이번 비엔날레에선 맨몸을 드러낸 채 전시되고 있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엔 검은 고무매트가 깔려져 ‘전복과 도발’이라는 콘셉트를 잇고 있다.

예술의 마법, 미스터리, 수수께끼를 함께 살펴보자고 손을 내미는 이번 비엔날레는 보다 광범위하고 포용적이며 민주적인 과정을 품고 있다. 부산비엔날레이지만 광주민주항쟁 등 한국의 아픈 근ㆍ현대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가 하면,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 묻고 있다. 그 좋은 예가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의 낡은 신발들과 그들이 만든 종이꽃을 연꽃처럼 늘어놓은 성효숙(현장활동 미술가)의 작품 ’새벽 3시-진혼’이다. 1980~90년대 주목받았으나 이젠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민중미술 진영의 노원희의 회화들에 주목한 것도 이색적이다.

전직 대통령이 살았던 빌라의 리모델링 소식을 접하고, 남몰래 현장에 찾아가 버려진 카펫, 일본산 비데, 파이프, 타일, 골프화 등을 수집해 이를 제단처럼 쌓은 함경아의 작업 ‘오데사의 계단’ 또한 매우 전복적인 작품이다. 오데사의 계단은 영화 ’전함 포테킨’에서 차르의 군대가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했던 곳을 가리킨다.

젊은 작가 노재운은 색색의 금속거울로 ‘대나무 숲의 유령들’이란 미로를 만들었다. 몬드리안의 색면회화를 삼차원으로 변주한 듯한 이 작품은 반짝이는 거울의 반사효과로 공간 속에 들어온 관람객이 유령처럼 거울에 비추게 된다. 


부산의 가장 오래된 아파트인 좌천동아파트에 전세를 들고, 작업한 미국 작가 메리 앨렌 캐롤의 ‘No.18’은 시민들과의 협업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작업이다. 캐롤은 배움위원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공원과 잔디밭이 부족한 한국에서 건물 곳곳에 녹색 매트를 즐겨 까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곤 좌천동아파트 주변건물 옥상에 매트를 까는 프로젝트를 펼쳤고, 그 과정을 미술관에 풀어놓았다.

저개발국 섬유노동자의 척박한 현실과 희생에 주목한 작가 이네스 도야크는 이색 프로젝트를 시현했다. 인간을 옥죄는 굵은 쇠사슬, 검은 화마 이미지를 직물에 프린트한 후, 이를 대형 걸개에 늘어뜨려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관람객이 원할 경우 이 옷감으로 블라우스를 지어주는 것. 굵은 쇠사슬이 프린트된 직물로 지은 블라우스는 얼핏 보면 명품브랜드의 고급 블라우스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노동자의 목을 옥죄는 검은 사슬이 새겨져 있다. 


태국 작가 사카린 그루에온은 늪지가 멸종되며 죽어가는 노루를 상징하는 노루뿔 백여개를 도자기로 빚어낸 뒤, 검은 공간(석유밭을 은유한다)에 둥둥 띄워놓았다. 눈 앞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이 결국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설치작품이다. 


올 광주비엔날레에 영상작업을 내놓은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는 부산비엔날레에는 설치작품을 출품했다. 2008년 중국 쓰촨성 지진 현장에서 수집한 휘어진 철근과, 이를 주물공장에서 똑같이 복제한 철근들을 나란히 내놓아 진짜와 가짜, 진실과 눈가림의 문제를 되묻고 있다.

금년도 부산비엔날레의 본전시는 예년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41명의 참여작가가 참여했다. 그러나 위르겐 스톨한스라는 작가는 부산 일대 곳곳을 다니며 발견한 낯선 풍경과 모티프를 그린 드로잉 40여점을 미술관 곳곳에 내걸었고, 김용익 노원희 작가의 경우 각기 수십점의 회화를 출품해 점수로는 풍성하다. 특기할만한 점은 전혀 예기치 않은 코너에서도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한편, 특별전 ‘Outside of Garden’은 공모를 통해 선정된 9명의 신진 큐레이터가 기획한 9개의 전시로 이뤄졌다. 이들은 부산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부산진 역사와 광안리의 미월드, 부산문화회관 등에 다양한 작품들을 풀어냈다. 이 특별전이야말로 올 비엔날레가 내건 ’배움의 정원’이란 주제에 잘 부합되는, 진행형 전시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부산비엔날레는 본전시및 특별전을 포함해 22개국에서 107명의 작가가 총380점을 출품했다. 스타급 유명작가의 검증된 작업, 잘 다져진 작품보다는 실험적이거나 전복적인 작품들이 많으며, 전시 디스플레이 또한 매우 가변적이다.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예술이 아닌, 공공예술과 참여예술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칠고 덜 영글었다는 느낌도 준다. 배움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한다는 컨셉은 좋았으나 비엔날레를 통해 예술적 담론을 활발히 창출하는데는 미치지 못했다.

이두식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홍익대미대 교수)은 "부산비엔날레는 지난 1981년 태동했던 ’부산청년작가전’의 정신을 계승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젊은 작가들이 서로 힘을 모아 전시를 열었던 그 청년성이 우리의 정신이다. 여타 비엔날레에 비해 적은 예산(37억원)이지만 그 도전정신을 무기로 여기까지 왔다. 펄펄 뛰는 청년정신을 많은 이들이 비엔날레를 찾아 느꼈으면 한다”고 말했다. 11월 24일까지. 일반 7000원, 특별전은 무료 관람.

부산= 글,사진 이영란 선임기자/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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