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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희자관장 “남편이 ‘세계경영’하는 동안 나는 ‘예술경영’을 했다”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김우중(76) 전(前)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인 정희자(72) 아트선재센터 관장이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賞)’을 받는다. 독일의 몽블랑문화재단은 26일 오후 6시 밀레니엄서울힐튼호텔에서 정 관장에게 제21회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을 수여한다.

몽블랑상은 활발한 문화예술 후원활동으로 문화예술계 발전에 기여한 인물(또는 단체)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지난 20년간 10여개국에서 177명이 수상했다. 국내에서는 박성용 전 금호그룹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 등 7명이 받았으며, 정 관장은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상을 받는다. 그는 부상으로 주어지는 상금 1만5000유로를 평소 후원해온 부산 국제영화제에 전달할 예정이다.

정 관장은 25일 밤 헤럴드경제와 장시간의 전화인터뷰를 갖고, 수상 소감과 근황을 들려줬다. 대우그룹 해체 이래 김우중 전 회장이 여간해선 심정을 토로하지 않는 상황에서 부인은 가슴 깊이 묻어둔 소회도 전했다.
정 관장은 “문화예술계를 떠난 지 10여년이 지났는데 상을 받게 돼 뜻밖이다. 딸(김선정 부관장)이 잘하고 있어 난 그저 뒤에서 보고만 있는데…. 기쁘기보다는 마음이 무겁다. 큰 부담이다”며 “젊은 사람들이 날 기억해줘 고마울 뿐”이라 했다.

소감은 이렇게 피력했으나 그는 여전히 아트선재센터 관장으로 딸의 활약을 든든히 지원하는 버팀목이다.
정 관장은 남편이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세계경영’을 하는 동안 독자적으로 ‘예술경영’을 해온 인물이다. 김 전 회장이 너무 일에 빠져 지내느라 다른 곳엔 눈길조차 주지않자 그는 서울힐튼, 경주힐튼 등 7,8개의 호텔을 연달아 만들며 호텔을 통해 예술경영에 매진했다.
“중국 베이징과 옌지, 알제리, 모로코, 베트남에 호텔을 만들었는데 기왕이면 그 지역의 실력있는 작가를 발굴해 작품을 걸려고 했다. 그 나라만의 고유한 문화를 소개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 바람에 그 지역에선 내가 유망한 아티스트를 물색하고 다니면서 그림값을 올려놓는다는 소문도 났다”고 했다. 그는 호텔을 장식할 미술품뿐 아니라 호텔 내외부 인테리어, 심지어 객실에 비치되는 작은 파우치 하나까지 예술적으로 하려고 힘을 쏟았다. 때문에 그가 경영했던 호텔들은 “예술적 수준이 전혀 다르다”는 입소문이 퍼지곤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내에 ‘현대미술’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할 무렵이던 지난 1991년 경주에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사립 현대미술관인 선재미술관을 설립했다. ‘선재’는 아까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그의 장남의 이름이다. ‘워홀과 바스키아’(1991), ‘임멘도르프’(1992) ‘알렉산더 칼더’(1993) ‘보테로’(1996) 전 등 괄목할 만한 전시를 잇달아 개최했다. 또 독일 프랑스 중국 폴란드 등의 첨단 현대미술도 소개했다. 당시는 삼성문화재단이 현대미술 부문에선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지 않던 때라 경주 선재미술관의 전시들은 큰 화제를 모았다. 게다가 해외여행이 지금처럼 흔치 않던 시절이라 의미 또한 컸다.
“앤디 워홀이며 바스키아의 작업이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아 무척 생소하던 1991년에 선재미술관에서 둘을 묶어 전시를 했었다. 특히 바스키아는 미국에서도 거리에 낙서하는 작가로 취급되며 지금처럼 스타로 숭앙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예술혼에 빠져 전시를 유치했다. 그 뒤로도 기억에 남는 전시들이 참 많다”고 회고했다. 

정 관장은 1998년에는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아트선재센터를 건립해 대중이 현대미술과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은 월드스타로 우뚝 서며 루이비통과 콜라보레이션도 펼치고 있는 일본 작가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도 2003년 개최한바 있다.
또 서도호, 이불, 김홍석, 김소라, 박찬경, 정서영 등 국제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우리 작가를 키우는 일에도 앞장 섰다. 1995년 세계 정상의 미술제인 카셀도쿠멘타에 참여했던 설치미술가 육근병을 후원한 이도 그다. 아트선재센터를 거쳐간 작가들은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정 관장은 또 1996년 제1회 부산 국제영화제에 ‘선재상(賞)’을 제정, 시상하는 등 유능한 영화인 지원과 영화 발전에도 이바지해왔다. 이에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는 지난해 공로패를 전달한바 있다. 이밖에 창작무용이며 음악 부문도 적잖이 후원했다. 그는 “내 앞으로 쓰는 걸 아껴 문화예술계를 후원하려 했다”며 “그중 미술은 딸이 받아서 꾸준히 하고 있는데 한동안 딸과 취향이 달라 갈등도 있었지만 이제는 딸이 하는 걸 배운다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 관장은 “부산영화제에서 ‘선재상’을 시상하면 ‘선재’가 무슨 뜻이냐고들 묻는다. 또 아트선재센터를 찾는 관람객들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아들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오늘 그의 육신은 만져볼 순 없지만 이렇게 이 땅에, 그것도 예술계에 이름 두글자가 남았다. 선재는 30년 넘게 꿈많은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아마도 천상에서 우릴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지난 1999년 대우가 공중분해될 것을 알았느냐”고 묻자 “알았으면 그렇게 앉아서 당했겠느냐?”고 답했다. 미술관을 설립하기 이전부터 국내에서 알아주는 아트 컬렉터였던 정 관장은 내로라하는 주요 미술품은 모두 회사(동우개발 등) 소속으로 등재해놓아 그룹이 해체된 후 거의 건지지 못했다.
30여년 전 헨리 무어의 대형 청동조각 ‘여인와상’을 23만달러에 사들여 남산 힐튼호텔 로비에 설치했었지만 지금 1000만달러를 호가하는 그 조각은 그의 수중에 없다. 현재 아트선재센터의 수장고에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200~300호 크기의 한국작가의 대형 작품들이다. 게다가 경주의 아트선재미술관과 힐튼호텔 등은 올들어 경매를 통해 부산의 한 수산업자에게 넘어갔다.

그는 작금의 국내의 컬렉터와 기업들이 해외의 돈 되는 미술품을 수집하는데 열을 올리는 것에 일침을 놓았다. 될성 부를 우리 작가를 찾아내 그들이 쟁쟁한 작가로 성장해 해외무대를 누빌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더 급선무라는 것.
정 관장은 “이런저런 비판도 있지만 남편은 세계경영을 피력하며 ‘세계가 다같이 잘사는 시대’를 꿈꿨다. 오늘 다시 봐도 정말로 큰 그림을 그렸다. 아직도 나는 남편처럼 그런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런 사고(思考)를 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대우의 명예 회복을 바란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도 재계에선 김 회장의 ‘경영복귀설(說)’이 솔솔 나왔다. 그러나 그는 “남편의 건강상 이제 4~5년 정도 남았다. 국내에선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물론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선 아직도 조언을 요청하는 곳이 많고, 미래 전략 등에 관해 묻는 이들이 많아 여전히 바쁘다”고 전했다. 베트남과 미얀마에서 일 년의 대부분을 보내는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그 역시 일 년의 절반쯤은 베트남에서 지낸다. 가장 보람있는 일로는 베트남에서의 교육사업을 꼽았다.
“현재 베트남에서 매년 40-50명의 인재를 키우고 있는데 너무나 반응이 좋다. 앞으로 이들이 세계 무대에서 인재로 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시 태어나도 김우중 전 회장과 결혼하겠느냐는 질문에는 “다시 태어나면 일밖에 모르는 김우중과는 결혼 안 할 것이다. 다정다감한 사람과 살아봐야지”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친구 소개로 젊은 시절 김 회장을 만났는데 열정에 반해 결혼했다. 최소한 굶기진 않을 것 같았다”고 했다.
1999년 대우가 강제로 해체된 이래 이들 부부는 큰 고통을 겪었다. 화병이 생겨 번갈아가며 병원신세를 지곤 했다. 정 관장도 장ㆍ위 수술 등을 7~8차례나 했다. 그러나 이젠 가슴 속 응어리를 많이 삭혔다고 했다.
그는 오는 2017년 대우 창립 50주년에는 제대로 된 ‘대우사(史)’가 나올 것이라며 “회장이나 나나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사람이지만 대우의 그 치열했던 도전정신만은 이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며 말을 맺었다. 

/yrlee@heraldcorp.com,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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