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톤의 화폭에 촉촉한 눈망울을 지닌 인물을 그려넣은 그림으로 유명한 장샤오강은 그림에서처럼 시종일관 차분한 태도로 작가로서의 여정을 들려줬다. 데뷔초 작품에서부터 최근작까지, 자신의 전(全)시기 작업을 다양한 사진과 함께 단계별로 설명하며 세계 정상의 작가가 되기까지 그 숨가빴던 과정을 생생하게 토로한 것.
장샤오강은 지난해 4월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유화작품 ‘영원한 사랑’이 무려 7906만홍콩달러(약 110억원)에 낙찰되며 중국 현대미술 사상 최고낙찰가를 기록한 작가다. 그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성공한 작가로 남기 보다 진정성있는 작가로 남고 싶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왜 늘 가족사진을 그리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며 “중국은 오랫동안 집단이 중시됐던 국가로 개인의 가치는 도외시됐다. 나는 개인의 소중함을 되살려내기 위해 낡은 사진첩 속 가족들을 그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 가족은 꼭 내 가족이 아니라, 숨막혔던 격변기를 통과해온 중국인들이라고 했다. 즉 문화대혁명 등 역사적 사건 속에서 규격화를 강요당한 사람들의 내면을 그렸다는 것.
중국 윈난성 쿤밍에서 태어나 남부지역 명문 미술대학인 스촨미술학원을 졸업한 장샤오강은 “서양 모더니즘미술을 좋아했고, 특히 반 고흐를 좋아해 일부러 네덜란드까지 갔었다. 유럽에서 석달간 머물렀는데 절망감만 안고 돌아왔다”고 했다. 반 고흐같은 작업을 못할 것같다는 생각에 1년간 아무 것도 못했다는 것. 그러나 여기저기를 방황한 끝에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돌아와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게 됐다고 전했다. 서양의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해선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 또한 깨달았고, 결국 자신의 역사와 기억에 주목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후 탄생한 ’대가족-혈연’ 시리즈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오늘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40분에 걸친 작가의 강연이 끝나자 윤재갑 씨는 “오랫동안 장샤오강과 교류해왔지만 이번 포럼에서처럼 자세하게 그의 30년 작업과정을 전해듣긴 처음이다. 매우 의미있는 시간이었다”며 “치열하게 번뇌하고 성찰한 끝에 탄생한 그의 작업이 중국을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호소력을 갖는 이유를 선명히 알게 됐다”고 했다.
이어 “지난 세기 중국은 두개의 큰 집단적 개종이 있었다. 봉건왕조에서 사회주의로의 변혁이 이뤄진 1949년과,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개종한 1989년이다. 장샤오강은 혁명 등 격변기를 거친 중국인의 불안한 내면을 집약해냄으로써 중국 미술을 대변하는 아이콘이 됐다”고 평했다.
이날 장샤오강 특별세션은 참석자들의 질의가 연달아 쏟아져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미술을 전공 중인 한 남학생은 “당신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장샤오강은 “예술은 마음 속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식은 그 다음이다. 예술은 바다와 같다. 너무 깊고 크다. 반면에 개인은 너무 작다. 하지만 바닷가에 나가서 보면 나 또한 위대한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답했다.
초반 무명시절과, 요즘 유명해지고 난 뒤 작업에 임하는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느냐는 질문에는 “예술은 내게 삶이다. 성공했다고 달라질 게 없다. 예술은 사업이 아니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는 거다. 즁요한 건 진정성을 갖고 끈기있게 임하는 거다”고 답했다.
세션이 무르익어가자 대담자인 윤재갑 씨는 “장샤오강은 유명해지고 나서도 늘 검소하다. 너무 서민적으로 산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압도적이다. 그의 작업 자체가 중국 근현대미술사이다. 사실 나는 그의 작품이 고통과 상실을 표현하고 있어 잘 안팔릴줄 알았다. 그렇게 슬픈 그림을 누가 집에 걸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슬픔으로 가득 찼던 그의 그림은 많은 이들을 사로잡았다. 앞으론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그림도 기대해보겠다”며 대담을 마무리했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