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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레브스, 나치즘 낳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해부…파묵 “안나 카레리나가 나를 작가길로 이끌어” 고백
한 권의 소설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 놓기도 하지만 불과 30쪽짜리 소책자가 인류를 파괴시키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영혼을 뒤흔드는 책의 영향력은 극과 극을 오간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소설과 소설가’(민음사)에서 열입곱 살에 만난 소설들이 그에게 “두 번째 삶”을 제공했다고 고백한다.

2008년 가을 하버드대 ‘찰스 엘리엇 노턴’강연에 초청돼 여섯 차례 강연을 펼친 강연록인 이 책에서 파묵은 소설에 입문하면서 매료됐던 톨스토이ㆍ도스토옙스키ㆍ포크너ㆍ조이스ㆍ보르헤스 등 위대한 소설가들의 작품을 해부하며 자신의 문학 여정을 들려준다.

22살, 소설가가 되겠다는 그를 가족들은 말렸다. 그 나이에 인생을 알 수 없으니 세상을 경험한 뒤 쓰라고 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소설은 우리가 인생을, 사람을 알기 때문에 쓰는게 아니라 다른 소설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쓰고 싶었다”는 것.

그의 소설쓰기 공부는 다름 아닌 소설읽기였다.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어나가며, 그는 “나의 목소리를 찾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 작품은 ‘안나 카레리나’. 그는 세상 모든 소설 중에서 가장 완벽한 소설이라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만의 소설 이론, 소설 작법을 구축했다고 털어놨다.

“나는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 사이에, 소설을 아주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내 방에서 밤새워 가며 읽었던 모든 소설은 나에게 우주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 우주는 백과사전이나 박물관 못지않게 인생의 모든 면을 세세히 알려 주었고 나의 삶 못지않게 인간적이었으며, 오로지 철학이나 종교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심오하고 포괄적인 바람, 위로, 그리고 약속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본문 중)

파묵은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회화적으로 보여주면서 자신의 소설론을 펼쳐나간다.

그의 소설 창작법은 초점 흐리기, 모호함에 가깝다.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게 하기,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그리기다. 그런 원칙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집중하며 상상해나가야 한다. 그는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중심부 찾기의 정신적 탐험 속에서 ‘이런 게 바로 삶이구나’는 느낌을 얼마나 끌어내느냐에 있다고 얘기한다.

하버드대 고전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B.크레브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해로운 책으로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를 꼽고, 한 권의 책이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갖는지 보여준다. 

“청년 시절 나는 정신적인 결핍감 때문에 형이상학, 철학, 종교뿐만 아니라 문학도 읽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20대에 거의 생사가 달린 문제인 것처럼 흥분해서 중심부를 찾으며 읽었던 소설들 대부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에서 삶의 의미 또는 세상의 중심부를 탐색했을 뿐만 아니라…(중략) 나 자신을 계발하고 나의 세계관과 도덕적 감수성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소설과 소설가’ 중)

크레브스 교수는 ‘가장 위험한 책’(민음인)에서 수세기 동안 세계 각지에서 출간된 ‘게르마니아’와 관련된 엄청난 문헌자료를 찾아내고 라틴어와 히브리어, 독일어 등 언어역량을 집약시켜 왜 게르마니아인지 풀어나간다. 로마 집정관이자 역사학자인 타키투스가 쓴 30페이지에 불과한 소책자가 어떻게 가장 위험한 책이 됐는지, 라인강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그가 왜 게르만 민족의 기원과 관습이란 주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게 된 것인지 탐정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에 따르면 ‘게르마니아’의 유해성은 나치 이데올로기의 이념적 틀에 맞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틀을 만드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게르마니아’는 98년 타키투스가 여행자들의 보고와 문학적 자료를 토대로 게르마니아 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의 기원ㆍ관습ㆍ사회상을 간결하게 기록한 것. 필사로 전해지다 자취를 감춘 뒤 15세기에 양피지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상황이 바뀐다.

이탈리아 성직자들은 독일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 게르만족 개념을 끌어들였고 독일 지식인들은 민족정신을 고취시킨다. 그 후 500년은 게르마니아 오독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계몽주의자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유럽 전역에 전파했고 독일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란 연설문을 썼다. 프랑스 민족학자 고비노는 ‘게르마니아’를 근거로 ‘인종불평등론’을 제기한다.

크레브스 교수의 결론은 가장 위험한 책은 타키투스가 쓴 것이 아니라 그의 독자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오독과 왜곡이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현실에 예상치 못한 참극을 불러올 수 있다는 해석의 문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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