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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늘끝이 천에 닿는 순간 우주가 내게 다가왔다”
세계를 유목민처럼 누비는 글로벌 아티스트…김수자 12년만에 개인전 ‘To Breathe’
이불보를 꿰매시던 어머니를 보며
삶과 죽음·상처와 치유·음과 양의 이치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깨닫게 돼

“실의 궤적으로 돌아온 작품들
오랜 여행 마친후 중간 회고전 같아
5개월은 뉴욕, 나머지는 세계 곳곳…
살인적 스케줄? 쉬면 병나는 체질”


올해도 그의 수첩에는 해외 전시 일정이 빽빽이 적혀 있다. 한 달에 두세 건은 보통이고, 일년이면 약 서른 건에 육박한다. 올 들어 중요한 미술관 전시만 해도 미국 마이애미, 러시아 페름, 프랑스 생테티엔 등 열 손가락으로 다 꼽지 못할 정도다. 가히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어지간한 작가가 평생에 걸쳐 소화할 일을 이 작가는 2~3년에 해치우고 있다.

현대미술가 김수자(55).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는 한국 대중에겐 생소하지만 세계를 숨가쁘게 누비는 글로벌 아티스트다. 아시아 작가를 말할 때 늘 거론되곤 하는 그는 이제 월드 스타 반열에 확실히 올랐다. 내로라하는 전시기획자들이 그를 포섭(?) 못해 애를 태우니 말이다.

세계적인 사진미술관인 뉴욕 국제사진센터의 크리스토퍼 필립스 수석 큐레이터는 “오늘날 국제 미술계 정상급 작가 중 김수자만큼 살인적인 작업, 여행 스케줄을 조정하며 무수한 아이디어를 소화해내는 작가도 흔치 않다”고 평하고 있다. 


▶삶에 단단히 뿌리를 둔 예술=어느새 반백이 된, 긴 생머리를 질끈 묶고 올블랙 차림의 김수자가 지난달 29일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2000년 삼성미술관 로댕갤러리(현 플라토)에서 개인전을 가진 이래 12년 만에 고국에서의 본격적인 전시를 열기 위해서다. ‘To Breathe’라는 타이틀로 국제갤러리 2ㆍ3관에서 오는 10월 10일까지 열리는 전시에는 신작 및 대표작 등 7점의 영상작품이 나와 해외에서의 명성을 확인해볼 수 있다.

김수자는 “이번 전시는 내게도 의미가 크다. 꿰매고 잇는 ‘보따리’로 출발해 30여년간 여러 작업을 거쳐 신작 ‘실의 궤적’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오랜 여행 끝에 중간회고전을 갖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화가를 꿈꿨다. 삶을 끊임없이 관조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홍익대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마친 김수자는 그러나 기존 미술계의 갑갑한 틀과는 맞지 않았다. 삶과 유리된 그림들은 공허해 보였다. 그러다가 1983년 어머니와 마주앉아 이불보를 꿰매며 문득 천의 앞뒤를 오가는 바늘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마치 번개 치듯 영감이 찾아온 것. ‘바늘 끝이 천에 닿는 순간’ 우주적 에너지의 충격을 느낀 그는 삶과 죽음, 상처와 치유, 음과 양의 이치가 거짓말처럼 깨달아졌다고 한다.

이후 이불보, 보따리, 바늘로 ‘나와 자연’ ‘나와 우주’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바늘, 보따리라는 매체를 자기 자신으로 치환시킨 색다른 퍼포먼스와 설치, 영상작업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특히 ‘보따리 트럭’은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줬다. 작은 트럭에 알록달록한 보따리를 쌓아올린 뒤 그 꼭대기에 앉아, 그간 살아왔던 전국의 도시를 달렸던 1997년 작업은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군인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 전국을 옮겨다니며 살았던 그는 11일간 우리 땅 2727㎞를 누볐고, 그 기록을 영상에 담았다. 이 작품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선보여지며 김수자라는 이름 석 자를 세계 미술계에 또렷이 각인시켰다.

이후 뉴욕으로 터전을 옮긴 그는 보다 심화된 작업에 매달렸다. 남편, 아들과 떨어져 외롭게 작업에 올인하며 만든 것이 ‘바늘여인’ 연작(1999~2001)이다. 도쿄, 상하이, 델리 등 세계 8대 도시 한복판에 등을 돌린 채 서서 오가는 군중을 담은 이 작품에서 김수자의 몸은 바늘이 돼 각지의 인간을 엮고, 관통한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란 연작에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넘어, 시야를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넓혔다. 그 결과, 더욱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작업이 탄생했다. 2010년부터는 ‘실의 궤적’이란 초대형 작업(6부작)을 시작해 현재 1, 2부를 완성했다.

1부작은 페루의 마추픽추, 2부작은 유럽의 레이스 공방에서 촬영했는데, 서로 다른 지역의 인간과 자연이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하며 아름답고 숭고한 영상을 드리운다.

이렇듯 김수자의 작업은 많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구구한 서술이 없다. 지극히 시적이며 은유적이다. 인생과 삶을, 죽음과 시간의 문제를 명징하게 그려낼 뿐이다.

 
①②③서로 다른 문명권의 실 잣는 문화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유사점을 탐구한 김수자의 신작 ‘실의 궤적’. ④인도 델리의 복잡한 도심 속에 부동자세로 선 작가의 뒷모습을 촬영한 ‘바늘 여인’. ⑤‘실의 궤적’중 부분. ⑥남의 빨래를 해주며 살아가는 하층민을 담은 ‘뭄바이, 빨래터’.
[사진제공=국제갤러리&Kimsooja studio]

▶낮고 사소한 것까지 위무하는 미술=한동안 낡고 조야한 이불보를 꿰매거나 쌓으며 형상을 만들었던 김수자는 요즘 영상작업에 치중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새로운 관점을 드러낼 것인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제 미술계 정점에 서기까지 김수자는 각고의 시간을 겪어왔다. 마치 독립군처럼 모든 걸 혼자 헤쳐왔다. 게다가 작업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 탓에 경제적으론 피를 말리기 일쑤다. 명품 백은커녕 낡은 검정 헝겊백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에 늘 검은 옷만 입고 다닌다. 작품에서 군더더기를 모두 덜어냈듯, 삶 역시 군더더기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1년 중 5개월쯤은 뉴욕에서 작업하고, 나머지 7개월은 지구촌 곳곳을 숨가쁘게 오가는 그는 “내가 생각해도 살인적인 스케줄이지만 오히려 쉬면 병이 나니 아무래도 체질인 듯싶다”고 했다.

지난 30년간 바늘로 인간 삶의 본질을 찌르고, 실로 세상을 엮어온 그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모든 작가적 에너지를 쏟아부어, 다양한 삶과 자연, 문명을 아우르며 세계의 총체성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인도 뭄바이 빈민촌의 지극히 낮고 비루한 삶에서부터 드넓은 대지와 바다, 펄펄 끓는 용암까지 넓게 깊게 바라보며, 미술로 ‘치유의 시’를 써온 그다운 대답이다. 김수자, 그는 궁극에 도달하길 꿈꾸고 있다.

<이영란 선임기자>
/yrlee@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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