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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의 상상력 사전> 바위가 짓누르듯…말이 꽉 막힐때 춤이 말을 시작했다
춤 혹은 피나 바우쉬
사랑·고독·불안·환희·절망·폭력…
인간 내면을 담아낸 전설의 무용수 피나
25년지기 벤더스 감독과의 교감·영화작업

피나의 작품세계 생생한 3D로 재탄생
무용수들의 땀·숨소리마저…경이로운 체험


2008년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부퍼탈의 시립발레단. 인근 12개 학교에서 온 10대 청소년 46명이 모여 춤을 추기 시작했다. 대부분 춤은 처음이었다.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10개월간 연습했다. 작품은 ‘매음굴’이라는 뜻을 담은 독일어 ‘콘탁트호프’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공포, 두려움, 절망, 외로움, 절박함, 폭력성을 그린 작품이었다.

가장 유명한 장면 중엔 한 여인을 둘러싼 남자들이 처음엔 부드러운 손길로 상대를 쓰다듬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야만적으로 변하는 대목이 있다. 아이들도 연기한다. 한 소년이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무대 중앙의 소녀를 어루만진다. 손길은 점점 빨라지고 많아진다. 소녀 주위를 둘러싼 13명의 소년 전원이 거친 동작으로 소녀의 몸을 헤집는다. 소녀의 얼굴은 점차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져 간다. 현실과 무대 위 역할이 구분되지 않는다. 소년들이 사과한다. “우리가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야. 너에게 상처를 줄 의도는 없었어.” 소년소녀들 속엔 한 번도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 아이도 있고 상대방에게 전혀 무관심한 친구도 있었다. 세르비아 전쟁에서 잔혹하게 가족을 잃은 소녀나 여성차별이 일상화된 무슬림계 집시 아이도 있었다. 

영화‘ 피나’는 인간의 내면을 춤으로 담아낸 세계적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피나 바우쉬의 작품세계가 담긴 작품이다. 오른쪽 사진은 이를 3D 영화로 옮긴 빔 벤더스 감독과 생전의 피나 바우쉬.

아이들은 춤을 통해 희로애락의 다른 표현을 배운다. 자기 안의 상처와 마주한다. 끔찍했던 경험도, 세상으로부터 숨어들어 스스로 쌓아올렸던 벽도 응시한다. 그리고 어느새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세상에 말을 걸고자 하는 욕망이 내부에서 꿈틀대고 있음을 발견한다. 한 쌍의 소년소녀가 무대 양끝에서 순결한 러브신을 연기하기 위해 속옷만 남기고 모두 벗어야 하는 장면 속으로 아이들은 한 걸음을 내딛는다. 춤은 언어고 소통이며 ‘드러냄’이다.

이 프로젝트의 창안자는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피나 바우쉬다. 그가 10대 청소년들을 모아 수행한 교육프로그램은 ‘피나 바우쉬의 댄싱 드림즈’라는 다큐멘터리에 담겼다.

피나 바우쉬를 스크린에 담고 싶은 또 한 명의 영화인이 있었다. 독일의 거장 감독 빔 벤더스다. 그는 1985년 베니스를 방문했을 때 피나 바우쉬의 전설적인 공연 ‘카페 뮐러’를 처음 접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예술적 교감과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됐고, 빔 벤더스는 피나 바우쉬와 그의 작품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했다. 하지만 춤과 영화 사이의 거리는 좁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빔 벤더스는 아일랜드 출신 록밴드 U2의 3D 공연 실황 영화를 보고 20여년간의 딜레마를 풀었다. 빔 벤더스는 “춤을 표현하기에 3D 이상의 도구가 없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피나 바우쉬는 영화 기획이 완성되기 전인 2009년 암진단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빔 벤더스는 “피나 바우쉬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피나 바우쉬의 작품세계에 관한 작품”을 만들고자 했고 “단순히 관객들을 무대 위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 존재하는 사람들, 무용수 사이에 존재하도록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했다.

30일 국내서 개봉한 영화 ‘피나’(3D)다. 이 영화에서 3D는 춤을 보여주는 매체가 아니라 춤을 체험토록 하는 수단이다. 카메라는 객석의 무대 바로 앞 A열에서 무대를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정중앙의 VIP석으로 관객을 데려가기도 한다. 그리고 무대 위로 올라 무용수들의 움직임 전체를 조망하는 안무가가 되기도 하고 무용수들 사이에서 춤을 함께 추는 또 다른 무용수가 되기도 한다. 관객은 무용수들의 표정과 숨소리, 땀에 젖은 몸짓을 생생하게 보는 것을 넘어 그들과 함께 대화하며 웃고 떠들고 화내고 분노하는 경지로 인도된다. 새롭고 경이로운 체험이다. 관객은 수천송이의 꽃이 깔리고 물은 무용수의 발목에서 찰랑거리며 위에선 장대비가 퍼붓고 때로 쓰레기나 흙더미, 거대한 바위가 채워진 무대 위로 불려간다.

‘피나’엔 피나 바우쉬의 작품 ’봄의 제전’ ‘카페 뮐러’ ‘콘탁트호프’ ‘보름달’ 등 4편의 주요 장면이 담겼고 무용수들의 인터뷰가 삽입됐다. 인간관계 속에 내재한 근원적인 고독과 불안, 사랑과 자유, 슬픔과 환희, 낙관과 절망, 유머와 폭력을 담은 피나 바우쉬의 작품 세계가 3D를 통해 형태를 얻고 질감을 띠게 됐다. 피나 바우쉬는 생전 “도저히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사실 말이라는 것도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 이상은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춤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피나 바우쉬의 또 다른 스크린 속 모습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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