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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전 올림픽은 ‘예술’이었네!
1912년 스톡홀름대회 ‘건축 · 회화 · 조각 · 음악 · 문학’ 예술경기 채택…2차대전 후 보편성 강조 영향 점차 쇠퇴
고대 올림픽선 음악·시낭송도 경연에 포함
예술로 정신 수양·스포츠로 신체 단련

근대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이 도입
작품내용은 ‘스포츠의 순간’ 으로 제한

1948년 런던대회까지 30여년간 지속
귀족문화 거부감 등 이유로 1952년부터 제외


올림픽 선수단의 선전으로 한국은 올림픽 사상 최다 금메달 기록 경신 가능성마저 보여 2012 런던 올림픽 열기가 최고조다. 오늘날 올림픽 모토로는 ‘더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가 일반적이지만 100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더 아름답게’가 포함됐을 게 분명하다. 다양한 예술 분야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기 때문이다. 당시 올림픽은 스포츠인들뿐 아니라 문화ㆍ예술인들의 마음까지 설레게 했던 셈이다. 경기마다 모든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과연 예술 종목에선 어떻게 펼쳐졌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100년 전 올림픽에선 ‘예술 종목’도 열렸다=기원전부터 열린 고대올림픽에선 스포츠뿐 아니라 음악이나 시 낭송, 조형예술 등이 중요하고도, 당연한 경연 종목이었다. 근대올림픽의 아버지인 피에르 쿠베르탱은 새로 시작될 올림픽도 그렇게 재현하고 싶어했다. 올림픽을 통해 예술과 스포츠를 연결시키고, 정신과 신체 그리고 마음을 조화시키겠다는 그의 생각은 매우 확고했다. 그런 염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잘 나타난다.

“청소년들을 위해 올림픽에 스포츠와 관련된 예술 도입이 또 연기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나는 1906년 봄, ‘예술 과학 그리고 스포츠를 위한 자문위원회’를 소집하기로 결심했다.”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 개막식

그 결과, 1912년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제5회 올림픽에선 근대올림픽 최초로 ‘예술경기’가 시범 종목으로 채택돼 40년 가까이 이어졌다. 경기 종목은 ‘건축’ ‘회화’ ‘조각’ ‘음악’ ‘문학’의 5가지. 다만 작품의 내용은 스포츠에서 얻은 착상을 기초로 올림픽의 의미와 이미지, 스포츠의 순간을 담아내는 것으로 제한됐다. 우수한 성적을 거둔 참가자는 스포츠 종목에서와 마찬가지로 금(金)ㆍ은(銀)ㆍ동(銅)메달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쿠베르탱 남작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처음 시작된 올림픽 예술 종목에서 문학 부문의 금메달 수상작은 모두 9편으로 구성된 ‘스포츠에 바치는 송가’였다.

“오, 스포츠! 그대, 신들의 선물, 생명의 영약이여! 어두운 노동의 시대에 기쁨의 빛줄기 비취는구나”라고 노래한 시인은 ‘게오르게스 호르트’와 ‘마르린 에슈바르’였다. 이들은 근대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이 가명으로 만들어낸 인물들이었다. 결국 쿠베르탱이 금메달 수상자였던 셈이다. 그는 왜 가명으로 출품했을까? 올림픽이 새로 시작될 수 있도록 기초를 놓은 자신이 선수로 참가하면 자칫 심판들이 공정한 판정을 하지 못할 것이란 점을 의식했을까? 그때는 가명으로 참여해도 되는 것일까? 물리적으로 측정하는 기록경기가 아니라 예술성을 놓고 겨루는 예술 종목이기에 가능한 추측이다.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
 
▶운동도 잘하는데 그림까지 잘 그려?=아마추어 정신을 강조한 올림픽 경기답게 당시에는 기존 스포츠 선수들도 예술 종목에 얼마든지 참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스포츠는 물론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등장했다.

알프레드 허요시는 1920년에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개최된 제7회 올림픽에서 수영 선수로 메달을 획득한 후 다음 올림픽인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선 건축 종목 금메달을 땄다. 미국 월터 와이넌스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사격과 건축 두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해 다관왕을 하기도 했다. 룩셈부르크의 장 자코비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회화ㆍ드로잉ㆍ수채화 종목에서 금메달 두 개를 손에 넣어 역대 올림픽 예술 종목 최다관왕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24년 파리올림픽

일본인 화가 후지타 류지와 스즈키 스지야쿠는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11회 올림픽 ‘회화 종목’에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렸다. 아시아인으로선 흔치 않은 메달이었다.

▶예술 종목은 왜 올림픽에서 사라졌을까=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채택됐던 올림픽 예술 종목 경기는 1948년 런던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1952년 헬싱키 대회부터 올림픽 무대에서 퇴출당했다. 오늘날은 올림픽 헌장에 예술 경기 대신 개최국은 예술 전시를 의무적으로 가져야 한다는 규정만 있을 뿐이다.

예술 종목 퇴출의 표면적인 이유는 아마추어와 프로 예술가 사이의 애매한 경계와 자격 문제, 작품의 반입비ㆍ보험료의 개인 부담, 개최국마다 다른 경기 규칙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당시의 문화ㆍ사회적인 요인도 올림픽 예술 종목 퇴출에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근대올림픽 초창기는 예술을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스포츠를 통해 신체를 단련하는 유럽의 귀족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창시자인 쿠베르탱부터 전형적인 귀족(남작)이다. 하지만 평등한 세상으로의 변화 물결이 거세지자 귀족 중심 분위기는 쇠퇴해갔다. 

알프레드 허요시
피에르 쿠베르탱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과학대 교수는 “스포츠는 시대상과 사회상 그리고 국제 관계 등 여러 영역과 연결돼 영향을 주고받는 복잡한 분야”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올림픽이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 잡으면서 보편성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림픽에서 예술 경기가 사라진 지 약 60여년이 지났지만 올림픽 종목 변화에 사회 분위기와 국제 관계가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지대하다.

정 교수는 “약 7년 전에 야구와 소프트볼이 올림픽 종목에서 빠진 것도 국제정치의 영역과 관계가 깊다”고 말했다. 미국의 패권주의에 심기가 불편해진 유럽 IOC 위원들이 미국 주축의 두 종목을 빼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정 교수는 “올림픽 경기 자체도 재미있지만 이 같은 이면을 본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올림픽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태형 기자ㆍ이슬기 인턴기자/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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