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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자질 갖춰야 성공” 피폐한 국토 재건 앞장
峨山의 남다른 건설산업 애착
“현대건설 외에도 많은 업종의 회사를 갖게 돼 그룹회장, 명예 회장으로 불리고 경제인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건설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잃어본 적이 없다.”

성취감을 좋아해서일까. 정주영 회장은 건설업에 대한 애착이 컸다. 건설업이야말로 인간으로서 모든 자질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는 업종이며, 해외 건설 책임자에게는 어떤 일을 맡겨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쌀가게, 자동차 정비소 등을 거쳤지만 결국 현대그룹의 근간도 건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정 회장과 함께 현대그룹의 토대를 쌓은 것이 바로 건설인 셈이다. 2010년 말 현대건설 인수를 둘러싸고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이 소송을 주고받으며 격하게 대립했던 까닭도 현대건설에 대한 아산의 애정과 현대가(家)의 상징성 때문이다.

아산은 현대건설을 이끌고 한국 경제가 6ㆍ25동란으로 피폐된 국토를 재건하려 할 때 선두에 서서 전후 복구공사를 담당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역사적인 사회간접자본 시설은 거의 정주영에 의해 주도됐다. 소양강다목적댐(1967년), 경부고속도로(1970년), 울산조선소(1973년), 원자력발전소(1970년) 등 모두 당시로서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미증유의 사업이었다.

1965년 국내 기업 최초로 태국 고속도로 사업 등 해외 건설시장 개척에도 나섰다. 1970년대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 20세기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아산(맨 오른쪽).

정 회장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은 1950년 1월. 이 당시 종업원은 25명에 불과한 소규모 영세 건설업체였다. 그러나 이후 현대건설은 미군 공사와 전후 복구공사를 수행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 불과 10년 만인 1960년 종업원 125명의 1위 종합건설회사로 부상했다.

물론 현대건설이 승승장구한 것처럼 보이나 어려움도 많았다. 휴전협정이 조인됐던 그해 4월 정 회장은 고령교 복구공사를 맡아 했으나 경험 부족과 장비 부족 등의 이유로 비용적 측면에서 막대한 피해를 봤다. 빚쟁이들이 벌떼같이 달려 들었다고 했지만 손해를 보면서까지 공사를 마무리했다. 훗날 현대건설의 신용을 드높이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김대연 기자>
/sonamu@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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