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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면성에 감복…쌀가게 주인, 종업원 峨山에 사업을 맡기다
현대의 모태 경일상회·아도서비스를 찾아서
신당동 쌀가게 복흥상회 주인
아들 대신 峨山에 장부 맡기고
2년뒤엔 가게 인수 제안도
1938년 첫사업 경일상회로 출발

車수리, 성공 가능성만 보고 도전
아도서비스, 글로벌 현대車 시발점

해방 후 현대자동차공업사 이어
현대토건사 창업 그룹토대 다져



[헤럴드경제=김대연 기자]열아홉 살에 마지막 가출을 감행한 정주영은 인천부두를 거쳐, 서울 안암동 보성 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신축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용산역 근처 풍전엿공장(현 오리온제과 추정)에 취업했다.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던 그가 다시 구한 안정적인 첫 직장은 신당동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 처음 경험해본 장사의 매력은 엄청나게 컸다. 그는 당시를 “이제부터 장래가 트이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분과 기쁨의 나날이었다”고 전한다.

아산은 사업에 성공하기 위한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가 물려주신 특유의 부지런함, 어떤 손해를 감수해도 약속을 지켜내는 신용,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긍정적인 사고가 모두 해당된다. 여기에 일제 시대, 6ㆍ25 전쟁 등을 거친 뒤 폐허가 돼 버린 대한민국이 경제를 살리고 각종 인프라를 구축해 산업을 일으켜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는 점도 그의 도전정신을 부추겼다. 경일상회, 아도서비스를 거치며 한층 단단해진 정주영.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고 싶은 아산에게 건설은 운명과도 같은 사업이었다. 
아산이 처음 시작한 장사는‘ 경일상회’, 지금도 당시 경일상회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서울 중구 중앙시장에는 여전히 쌀가게들이 밀집해 있다. 아산이 처음 자동차 수리 공장‘ 아도서비스’를 창업한 곳으로 추정되는 서울 아현동 고개(지하철 아현역~신촌로터리). 1930년대 복흥상회 아주머니와 함께한 청년 시절의 아산. 박해묵 기자/mook@

▶현대그룹의 모체 경일상회, 현대자동차의 뿌리 아도서비스=소판 돈을 들고 가출해 두 달가량 배운 부기(簿記: 자산ㆍ자본ㆍ부채의 출납, 변동 등을 밝히는 기록법)는 그의 부지런함과 함께 복흥상회 주인의 전폭적인 신임을 가져다 줬다. 6개월 만에 주인은 난봉꾼이었던 아들 대신 장부 정리를 맡겼고, 급기야 주인은 2년 만에 복흥상회 인수를 제안했다.

이에 청년 정주영은 처음으로 신당동 길가에서 본인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서울에서 제일 가는 가게를 만든다는 포부로 1938년 1월 경일상회(京一商會) 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나이 스물넷, 고향을 떠난 지 4년 만의 일이다. 굳이 따지자면 경일상회가 훗날 현대그룹의 모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위치는 서울 중구 흥인동 40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서울 중구청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구청 도시디자인과를 중심으로 중구 명소 만들기 사업을 하고 있는데 정주영 명예회장의 과거 자료를 종합해 내린 결론”이라고 전했다.

중구 흥인동은 중구의 명소인 중앙시장이 있는 곳이다. 황학동 일대(왕십리)를 중심으로 들어선 중앙시장은 미곡부, 포목부 등을 포함해 총 9개부 685개의 점포로 형성돼 있으며, 유독 쌀가게(미곡부)들이 흥인동 쪽으로 몰려있다. 물론 중앙시장 자체도 쌀과 인연이 깊다. 중앙시장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1950년 6ㆍ25 전쟁 직후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몰려와 최초 쌀장사를 하면서 커온 시장이 중앙시장이다. 서울 4대문 안과 밖을 잇는 곳에 서울에서 최고의 쌀가게가 되겠다며 문을 연 아산의 경일상회와 지금도 쌀집으로 유명한 중앙시장의 위치가 비슷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경일상회는 중일전쟁 발발로 일본이 1939년 12월부터 쌀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문을 닫았다. 이후 아산은 1940년 초 빚을 내 아현동 고개에서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한다. 차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성공 가능성만 보고 도전했다. 지금의 위치는 마포구 아현동 북성초등학교 맞은편 아현뉴타운 일대라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 김양균 학예사은 “옛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아마 지금 지하철 2호선 아현역에서 신촌로터리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보인다”고 전했다. 세계 5위(2011년 기준 기아차 포함)의 글로벌 자동차 회사가 된 현대자동차가 바로 여기서 출발한 것이다.

훗날 아산의 트레이트마크가 된 공기단축도 아도서비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리 기간을 줄이고 가격을 높이는 방법으로 장사를 잘했다. 그러나 잔금을 치른 지 닷새 만에 불이 났다. 트럭 다섯 대와 당시 세도가의 고급 승용차까지 태워 먹었지만 그는 좌절하진 않았다. 신용만으로 3000원을 빌려 사업을 했던 그는 다시 신용으로 3500원을 빌려 이번에는 신설동 빈터를 

얻어 무허가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노력을 쏟아부으면 성공 못 할 일이 없고, 밤 새워 이해하고 공부해 자동차를 알게 됐으며, 또 신용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아도서비스는 정신없이 몰려드는 일감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1943년 그가 스물아홉이던 해 일본이 종로의 일진공작소와 강제 합병시키는 바람에 문을 닫게 됐다.

▶현대건설…정주영 “나는 건설인이다”=해방 후 독자적인 사업 기회를 찾던 그는 1946년 4월 중구 초동 106번지에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을 걸고 자동차 수리 공장을 다시 시작했다. 이 현대자동차공업사가 바로 지금의 ‘현대’라는 상호의 시작이다. 현 위치는 지하철 3호선 을지로 3가역 9번 출구, 명보아트홀 맞은편인 을지로3가 296-5번지로 파악된다.

여기서 정주영는 다시 건설업에도 도전한다.

“어느날 건설업자들이 공사비를 받아가는 것을 봤다. 내가 받는 수금액은 한번에 고작해야 30만~40만원 정도인데 건설업자들은 한번에 1000만원씩 받아가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사업의 묘미를 더 알게 된 그는 당장 초동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더 달았다. 1947년 5월 25일 현대건설의 출발이었다. 이후 미군 부대시설 공사를 하던 현대토건은 1950년 1월 현대자동차공업사와의 합병을 통해 현대건설주식회사로 거듭난다.

6ㆍ25전쟁이 발발해 부산 범일동으로 피란을 가서도 아산은 현대건설 간판을 달아 놓고 일을 한 덕분에 미 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다 독점했다. 한겨울 보리밭을 떠다가 푸른색으로 덮었다던 유엔군 묘지 단장하기도 이때 나온다. 현대건설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57년 9월에 착공했던 한강인도교 복구 공사 수주 때부터. 단일공사로는 전후 최대 규모의 사업을 경쟁입찰을 통해 따낸 것이다. 아산은 “이때부터 대동공업, 조흥토건, 삼부토건, 극동건설, 대림산업에 이어 우리 현대건설도 소위 건설 5인조니, 6인조니 하며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회고했다.

이후 현대건설을 통해 한국 역사상 최초로 해외에 진출(1965년)하고,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며(1970년), 정주영 공법으로 서산 천수만 간척 사업(1984년)을 해낸 아산은 점점 더 큰 꿈을 꾸게 된다.

sonamu@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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