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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이 품은 통천…그에게 고향은 평생의 짐이자 힘이었다
현대 창업주 峨山 정주영 회장의 삶·역정
벅차고 아름다웠던 감나무 많던 땅
소년에겐 결국 떠나야만 했던 곳…

열아홉 되던 해 서울로 네번째 가출
진한 향수는 ‘민족사업’ 잇게한 자산

1989년 금강산 개발 위해 찾은 북녘
그것은 남북교류의 장대한 서막이자
꿈속 고향으로의 ‘드라마 같은 귀향’



금강산 인근이니 한반도에서 호랑이 등 언저리다. 대한민국 경제 발전과 남북 교류의 기틀을 다진 거목(巨木),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 정주영 회장의 고향 강원도 통천(通川)군 송전(松田)면 아산(峨山)리. 지금은 북한 땅이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한 그의 인생의 출발점이었고, 또 남북 교류의 꿈을 잊지 않게 해준 질기고 굵은 끈이었다. 오죽 그리웠으면 호도 ‘아산(峨山)’이라고 했을까.

아산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의 첫 페이지도 ‘그리운 고향 통천’에서 시작한다.

‘강릉에서 바다를 끼고 북으로 곧장 올라가면 속초, 화진포, 고성, 통천읍이 나오고 관동팔경의 으뜸 해금강 총석정을 지나서 키 작은 소나무와 푸른 바다가 있는 송전해수욕장, 그리고 그곳에서 걸어서 1시간 반쯤이면 닿는, 감나무 숲이 많은 곳이 ‘아산리’라고 고향을 소개하고 있다.

▶고향 통천, 삶의 원동력이자 평생을 짓누른 짐=1915년 아산은 통천에서 오로지 일밖에 모르고 말수는 적은 아버지,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사를 짓고 살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 통천은 누구에게나 고향이 그렇듯 벅차고도 아름다운 땅이었다.

그러나 통천은 소년 정주영에게 벗어나야 할, 극복해야 할 장소였다. 그는 무턱대고 도시가 좋았다. 철도 공사판으로 첫 가출을, 그리고 소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올라와 부기학원을 다니다가 아버지에게 덜미를 붙잡힌 것은 세 번째 가출이다. 장남으로서 마음을 다잡아 봤지만 더는 머무를 수 없었다. 고향에 붙잡아 두려던 아버지의 강한 집념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스스로 이미 잦은 가출로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망나니 자식이라고 간주했다. 세 번째 붙잡혀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농사를 짓겠다고 다짐, 농토를 넓히고 소를 키우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지독한 흉년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평생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고 죽도록 일해도 배불리 밥 한번 못 먹는 농부로, 그냥 그렇게 내 아버지처럼 고생만 하다가 내 일생이 끝나야 한다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했던 소년은 열아홉 살 되던 해 늦은 봄 네 번째로 집을 떠나 서울로 직행했고, 그것이 마지막 가출이 됐다.

물론 그는 훗날 어린 시절이 불행하지 않았다고 했다. 소득이 시원찮은 농사가 불만스러웠을 뿐 행복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한낮의 폭염이 가신 저녁에 들마루 아래 모깃불을 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강냉이를 먹던 기억, 무뚝뚝한 아버지가 쾌활한 어머니의 우스갯소리에 따라 웃을 때 더없는 행복감을 느꼈다고 했다. 해방 직후 아산은 한 차례 고향에 들르지만, 6ㆍ25 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된 탓에 다시 통천을 찾는 데는 무려 4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가 세계적인 기업가로 성공한 뒤에 민족사업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은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필생의 사업으로 금강산 관광사업 및 대북사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1989년 금강산 개발을 위해 40여년 만에 북한을 방문한 그는 마침내 고향을 찾는다. 당시 작은어머니에게 셔츠를 맡기며 “깨끗하게 빨아서 저기 걸어둬요. 다시 와서 입게”라고 했던 그는 9년의 세월이 흐른 1998년 83세의 나이에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 50대를 이끌고 다시 북한을 찾는다. 남북 관계가 꽉 막혀 있었던 김영삼 정권 시절 그의 소떼 방북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소년을 만든 것은 아버지… 그리고 금강산=아산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건강과 근면함만 있으면 족하다고 했다. 매사를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행복해할 수 있는 소질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공부라고는 소학교 들어가기 전 3년 동안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대학’ ‘맹자’ ‘논어’를 배우고, 너무 쉬워 1학년에서 3학년으로 월반했다는 소학교가 전부다.

그러나 그는 부모님의 근면함, 긍정적 사고, 서당 교육, 소학교(송전공립보통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 누구보다도 현명했다. 물론 고향인 통천과 인근 회양, 고성 등 3개 군에 걸쳐 있는 금강산도 아산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굳이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영산이라는 점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 소년은 어린 시절 금강산을 오르며 미래를 꿈꿨다. 그가 얼마나 금강산을 좋아했는지 일화가 있다. 1989년 1월 북한 평양 인민문화궁전 회의실에서 열린 금강산 공동개발 실무회의. 북측 인사가 금강산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시작하자, 아산이 불쑥 끼어들었다. 
1.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아산은 서산농장에서 키운 ‘통일 소’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다.(1998년)  2.현대자동차공업사 직원들과 금강산 구룡연에 오른 청년창업가 아산(왼쪽 위에서 두번째).  3.고향 생가에서 숙모, 조카와 함께.(1989년)

“일제시대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불타고 주춧돌만 남아 있었는데, 그때 그 자리가 지금도 그대롭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설명하던 북한 사람이 놀라며 “금강산에 대한 것은 회장 선생님께 더 드릴 말씀이 없겠습니다”며 추가 설명을 생략했다. 정 회장은 “어렸을 적 일하기 싫을 때마다 툭하면 갔던 곳이 금강산으로, 오솔길까지 대충은 다 알고 있다”고 자서전을 통해 전하고 있다.

해방 이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운영하던 시절 직원들과 종종 찾던 곳도 금강산이다. 한때 그는 금강산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금강산 관광을 도와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후 정 회장이 반세기 만에 남측의 국민들이 북한 땅을 밟도록 만든 상징적인 사건인 금강산 관광을 추진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금강산은 어머니 같은 고향이자 놀이터였고, 본격적인 남북 교류ㆍ협력 시대를 열도록 한 평생의 자산이었다. 


<김대연 기자>
/sonamu@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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