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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에이티브 코리아> “멜로·애니는 안된다” 불문율 깨고…부침 심한 영화판서 17년 건재
<3> 한국영화의 명품브랜드 명필름-심재명 대표
기획에서 예산·캐스팅·마케팅까지
제작과정 전체 조율·장악능력 탁월

두번째 작품 ‘접속’ 웰메이드시대 열고
‘공동경비구역 JSA’ ‘바람난 가족’ 등
내놓는 작품마다 호평·화제 만발

‘마당을 나온 암탉’ ‘건축학개론’ 등
주변에서 말리던 최근작도 흥행


2009년 초 명필름의 심재명(49) 대표는 동생이자 또 다른 영화사 보경사의 대표인 보경 씨로부터 ‘한번 읽어보라’며 시나리오를 한 편 건네받았다. 이용주 감독이 6년 전부터 쓴 ‘건축학개론’이었다. 그날 회식자리에서 귀가한 심 대표는 “술김까지 더해져 울며 웃으며 봤다”고 말했다. 집필자로부터 직접 받아본 작품도 아니고 제작 물망에 있었던 프로젝트도 아니라, 당시만 해도 남의 밥상 보듯 했다. “재미있긴 하지만, 잔잔하고 해피엔딩도 아니고 (흥행도 안 되는) 멜로드라마이니 누가 해도 만들기는 참 어렵겠다”고 생각만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이용주 감독이 정식으로 제작을 제안해왔다. 몇 년간 여러 영화사를 돌아다니며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이 들었던 시나리오였다. 이 감독은 “초고의 이야기가 너무 밋밋하다고들 해서 여주인공을 현재 미사리에서 노래 부르는 퇴락한 아이돌 가수로 바꿔봤다”고 했다. 몰래카메라에 리얼리티 쇼 등 양념이 많이 들어갔지만 심 대표는 “그렇게 되면 ‘우리 결혼했어요’와 다를 바 없지 않으냐, 초고의 느낌이 퇴색한다, 이 영화는 ‘기쁜 우리 젊은날’과 같은 첫사랑이 핵심이고, 옛 연인을 위해 집을 지어준다는 설정이 장점인 영화 아니냐”고 했다.

이 감독과 계약한 심 대표는 “기름기 빼고, 막장 요소 배제하고 처음 구상했던 초고의 이야기로 돌아가자”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투자자들이 다시 “밋밋하다”고 했다. 심지어 영화 개봉 직전엔 포스터나 홍보자료에서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아예 지우고 내세우지 말자는 투자 쪽의 강력한 요청도 들어왔다.

제작자로서 심 대표의 생각은 이 영화의 감성은 첫사랑과 건축에 처음이자 끝이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카피를 당당히 내세우고 제주도에 부지까지 얻어 촬영한 ‘건축학개론’은 30~40대 관객층으로부터 신드롬에 가까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역대 한국 멜로영화로선 최다인 41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캐스팅에 난항을 겪자 남녀 주인공 한 명씩 맡게 돼 있던 주연배우를 현재-과거 시점으로 나누어 4명으로 바꾼 것도 프로듀서로서 심 대표의 판단이었다.

영화는 90년대 초중반 대학을 다닌 30대 후반~40대 초반 연령층을 가리키는 ‘건축학개론세대’라는 조어까지 등장시키며 사회적 현상이 됐다. 멜로드라마는 안 된다, 건축은 낯설다는 등 단점으로 지목됐던 요소를 오히려 작품의 빛나는 매력으로 바꿔낸 심 대표의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이 관통한 작품이 됐다. ‘건축학개론’은 창립 17년사의 명필름의 작품 중 32번째 작품이었다. 역시 애니메이션은 안 된다는 한국영화의 불문율을 깨뜨리고 같은 장르에서 역대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둔 ‘마당을 나온 암탉’은 30번째 영화였다. 

심재명과 명필름은 영화 시장의 부침에 따라 제작사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한국영화 풍토에서 17년간이나 한자리를 지켜왔을 뿐 아니라 내는 작품마다 줄곧 호평과 화제의 대상이 돼왔다.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심재명의 명필름, 한국영화의 명품 브랜드가 되다= 명필름은 영국의 ‘워킹타이틀’과 곧잘 비교되는 한국영화의 ‘명품 브랜드’다. 영화시장의 부침에 따라 제작사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한국영화 풍토에서 17년간이나 한 자리를 지켜왔을 뿐 아니라 내는 작품마다 줄곧 호평과 화제의 대상이 돼온 제작사는 심재명과 명필름을 제외하곤 거의 전무하다.

삼성과 대우 등 재벌기업이 진출했다 철수한 1990년대와 CJ E&M 등 대기업 계열 대형 영화사의 지배구조가 안착된 2000년대를 모두 겪으며 제작사와 프로듀서의 입지와 위상을 지켜온 곳도 명필름이 유일하다. 특히 투자배급사 자본의 지배력이 강화되고, 매니지먼트사와 스타 감독의 영향력이 커지고 제작사의 입지가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최근 경향에서 기획과 파이낸싱에서 촬영, 마케팅까지 영화제작 전반에 관한 통제력과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프로듀서도 심재명 대표를 빼놓고는 아예 이야기가 불가능하다.

영화 내용뿐 아니라 예산, 캐스팅, 제작기간 등 제작과정 전체에 대한 정확한 예견과 계획, 조율과 통제능력을 갖춘 프로듀서로서 심재명 대표를 첫손에 꼽지 않는 이는 한국영화계에서 드물다.

▶프로듀서 심재명, 영화의 세계와 색깔이 되다= 심재명 대표는 프로듀서란 “스스로가 열광하고 소통 가능성을 확인한 이야기로 관객들을 흥분시키게 하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결국 한 제작사의 영화 색깔과 세계를 좌우하는 것은 프로듀서의 창의력과 취향, 세계관이라는 것도 심 대표의 지론이다.

심 대표는 한국영화사의 한 줄기, 명필름의 역사가 돼온 32편의 영화와 닮아 있다. “수줍음이 많고 수세적이며 내성적”이라고 스스로 표현하는 성격은 꼭 ‘건축학개론’ ‘광식이 동생 광태’ ‘접속’의 정서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통찰과 관심,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시선은 사회와 역사를 담은 ‘공동경비구역JSA’ ‘그때 그사람들’ 등 시대와 사회를 담은 작품 속에 묻어난다. 


심재명 대표의 남편인 영화감독 이은은 명필름의 공동대표다. 결혼과 함께 1995년 부부가 공동으로 명필름을 설립했다. 심재명이 제작과 창의력이라는 명필름의 한 날개라면 이은은 비즈니스라는 또 다른 쪽의 날개다. 명필름의 필모그라피 역시 두 부부의 취향과 세계관이 결합되면서 쌓여갔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과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궁극의 오락적 가치를 지니는 상업적인 매체로서의 영화를 고민하던” 심 대표와 “외향적이며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이 있고 인간과 역사, 사회적 소통의 매체로서 영화를 꿈꾸던” 이은 감독의 결합이 명필름만의 독자적인 색깔을 만들어낸 것이다. 영화의 동지로서 두 부부의 화학적 결합력과 시너지는 영국의 명제작사 워킹타이틀을 이끄는 절친한 친구 팀 비번과 에릭 펠너 콤비와도 비견된다.

▶명필름 17년= 심재명 대표는 극장 기획실의 직원으로 영화계에 발을 내디딘 뒤 지난 1992년 영화홍보마케팅사 ‘명기획’을 설립했다. 1995년 제작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명필름’으로 간판을 바꿔달았고 ‘코르셋’을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 이어 두 번째 작품인 ‘접속’으로 한국영화의 새로운 트렌드와 웰메이드 시대를 알렸고, 한국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제작사 중의 하나로 떠올랐다. 첫 두 영화를 실패한 뒤 시나리오 보따리를 들고 다니던 박찬욱 감독을 만나 ‘공동경비구역JSA’로 거대한 성공을 일군 것은 2000년이었다. 이어 ‘와이키키 브라더스’ ‘바람난 가족’ 등 문제작과 화제작을 잇달아 내놨다. 2004년 강제규필름과 합병해 ‘MK픽쳐스’로 덩치를 키우며 투자, 배급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주식시장에도 진출했으나 3년 만에 마감을 고하고 다시 ‘명필름’으로 귀환했다. ‘시라노 연애 조작단’ ‘마당을 나온 암탉’ ‘건축학개론’ 등 최근작이 연이어 성공했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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