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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업주 이병철>호암 생가 가보니…“먼 옛날 한 소년의 꿈 보이더라”
[헤럴드경제=(의령)홍승완 기자]“나 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오히려 만족한다. (중략) 논어에는 내적 규범이 담겨 있다. 법은 행위의 사후에 작용하지만 내적 규범은 인간사회의 규율에 적대하는 행위의 발생을 미리 막는다. (중략)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의 기술보다는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호암(湖巖)자전 중에서)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회장을 찾아가는 길, 내내 머릿속에 맴돈 구절이다. 호암은 왜 논어를 늘 끼고 살았고, 논어 구절을 암송하면서 평생 벗으로 삼았을까. 왜 논어와 경영을 하나로 봤을까. 척박한 시대의 재계 거목(巨木)에겐 논어가 말하는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경영과 관련해 어떤 진리로 다가왔을까. 해답은 생가에 있지 않을까.

마침내 도착한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주변의 산들이 마치 담을 둘러친 것과 같다고 해서 예로부터 ‘장내(墻內) 마을’로 불렸다. 우리말로는 ‘담안 마을’이다. 호암이 태어난 고장이다.

‘어쩌면 하늘이 내린 사람’, ‘산업 한국의 초석을 다진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호암이 나고 자란 곳이기에 제법 먼 발치에서도 쉽게 찿으려니 싶겠지만, 산자락 밑에 숨은 ‘대(大) 기업가의 생가’는 좀처럼 남의 눈에 띄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

마을어귀에 앉아 봄볕을 쐬고 있는 동네 할머니에게 다가가니 묻지도 않았는데 “호암선생 생가 왔는교? 일로(이리로) 쪽바로 드가소”하는 답이 돌아온다. 멀쩡한 청년과 카메라와 사다리를 짊어진 사진기자가 다녀간 것이 처음이 아닌 탓 일게다.

할머니가 가리킨 방향으로 정확히 시선 높이의 흙담을 따라 돌아 들어가니 그제서야 ‘호암 이병철 생가’라는 입간판과 함께 대문이 나타난다.

뒷동산 역할을 하는 마두산 끝자락을 따라 남서향으로 일자형 평면형태로 자리잡고 있는 전통 한옥집. 호암 생가다. 

대지면적 1907㎡에 자리잡고 있는 호암 생가는 전형적인 ‘전착후광(前窄後廣)’의 양식을 따랐다. 좁게 느껴지는 대문을 지나 들어갈수록 뒤가 넓어지는 구조다. 작은 방 두개를 끼고 있는 대문채를 지나면 우물과 함께 방 2개로 이뤄진 단촐한 사랑채가 있고, 그 뒤로 다시 우물과 작은 마당을 지나면 부엌과 방2개, 대청으로 이뤄진 안채가 자리한다. 안채 왼편엔 흙으로 지어진 광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집터는 작지는 않다. 그렇다고 요란하거나 큰 느낌은 없다. 소박한 집 주인의 풍채가 그림에 잡힌다.

호암 가문이 중교리에 터를 잡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510여년 전이다. 연산군 시대에 16대조 할아버지가 식솔을 이끌고 낙향하면서 부터다.

생가는 고 이병철 회장의 조부인 문산(文山) 이홍석 공이 직접 지었다. 안채의 지붕마루에 수평으로 걸린 ‘종도리’ 하단부에는 ‘신해년 계사월 신묘일 입주상향’이라고 적혀있다. 1851년부터 집을 짓고 살았다는 뜻이다.

건물은 깨끗하고 단아하게 보전돼 있었다. 본채와 사랑채는 몇 차례 증ㆍ개축을 거쳤는데 국내 최고 대목수인 신응수 씨가 최초 형태로 복원해 놨다고 한다.

이 회장은 안채의 우측 방에서 태어났다. 1910년 2월12일. 조선조 연기로는 융희(隆熙) 4년의 일이다. 높고 빛나라는 의미가 무색하게 한일강제합병 조약이 조인된 해이기도 하다. 경주 이 씨인 술산 이찬우 공과 안동권씨 모친 사이의 4남매 중 막내였다.

호암은 결혼 후 건너집(호암생가에서 도보로 1분거리)으로 분가하기 전까지 이집에서 성장기 시절을 보냈다. 

호암 생가 뒷산에 올라 내려다본 집터의 전경. 어렸을때 호암은 이를 보고 산 너머 바깥세상을 꿈꾸지 않았을까.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유년시절은 당시 여느 부유한 댁 소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5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집에서 3~4리 정도 떨어진 ‘문산정(文山亭)’을 오가며 천자문을 익히고, 논어를 통독했다. 문산정은 성리학자로 인근에 명망이 높았던 조부 이홍석 공이 만년에 지은 서당이다.

이 회장 가문은 알려진바 대로 연 3000석 지기의 의령지역 유지였다. 이 회장의 생가 자체는 그리 넓지 않지만, 좌우에 바로 자리잡고 있는 이 회장의 큰할아버지댁과 작은 할아버지 댁, 거기에 이 회장이 분가한 집 까지 합하면 마을의 거의 절반이 이씨 가문의 집이다.

그렇다고 이 회장 가문이 ‘박한 부자’는 아니었던 듯 하다. 특히 이 회장의 어머니는 후덕하고 인자한 인물로 주변에 정평이 나 있었다고 한다. 인정이 많고 세심해서 출산한 집에는 쌀 닷되 미역 한단을 반드시 보냈고, 친상을 당한 집에는 삼배와 광목을 수십년 동안 보내왔다.

마을 노인정 근처를 지나던 노인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옛부터 이 동네서 그집 도움을 안받은 집이 없을게라. 옛날에는 (생가에 있는) 사랑채 앞의 우물에 인근에 우물없는 집 사람들이나 지나던 사람이 누구나 와서 물을 길어가곤 했다더라”고 한다.

부모의 넉넉한 마음은 소년 호암이 청년이자 성인이자 기업가로 자아를 형성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이 창업 직전에 고향으로 돌아와 집에서 거느리고 있던 노비들의 신분을 해방시켜준 일이나, 제일모직 건립과 함께 최신식 설비로 여공 기숙사를 건설한 일, 국내최고 수준의 문화재단을 건립해 어려운 예술인들을 돕고 오늘날로 치면 ‘나눔 경영’에 앞장선 것은 이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분명히 영향을 미쳤으리라.

호암의 생가는 옛부터 명당으로 이름이 높았다. 호암이 유명해진 탓에 구구한 해설이 덧붙여 졌을지도 모르겠지만, 풍수지리학적으로 생가 터는 국내 최고의 명당 가운데 하나다.

이무형 생가관리 소장은 “집터가 곡식을 쌓아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峯) 형상을 하고 있고 내청용의 기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터에 혈이 되어 맺혀 있어 지세가 융성하다고 한다”며 “집에서 10리 앞에 진주에서 함안으로 흐르는 남강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입수 지형인데다가, 집의 앞은 나지막하고 뒤가 높아지는 전저후고에 전약후광 등 세부적으로도 풍수지리상의 명당의 요건은 다 갖추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보니 마을에서는 옛부터 저 집에서 인재가 날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집 내부에는 쌀가마니, 시루떡을 쌓아둔 것 같은 바위(4면 참조)와 부귀를 가져온다는 거북이 바위도 들어서있다. 선비들이 좋아했다는 큰 회나무와 봉황이 내려앉는다는 벽오동도 집터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옛부터 회나무가 있는 집에서는 큰 인물이 난다고 했다.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였던 호암도 어려서부터 이런 이야기들에 익숙했다. 호암이 조부모와 부모와 함께 가장 시간을 많이 보냈을 안채 좌측방에는 책과 그릇이 그려진 병풍이 서 있다. 그런데 좀 색다르다. 다른 대가댁들의 병풍이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이나 풍류를 이야기하는 산수화를 담고 있다면, 호암 가문의 병풍에는 지혜와 지식, 합리를 의미하는 책이 그려져 있다. 바로 그 병풍 밑에서 호암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부모는 물론 마을사람들에게 앞으로 크게 될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히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원대한 꿈은 이렇게 작은 칭찬과 격려로부터 영글어가는 법이다. 그런 호암에게 100여호가 모여사는 중교리는 어쩜 너무 작은 마을이었을지 모른다.

소장의 허락을 어렵게 얻어 생가를 조망할 수 있는 집터 뒷산에 사진 기자와 함께 올랐다. 숲과 언덕사이에 폭 묻힌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호암도 이 길을 밟았을 것이다. 마을의 아름다움에 취하면서도 마을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강했을 게 분명하다. 꿈많은 소년 호암에게는 마을보다는 언덕넘어 또 물길넘어 보이는 세상이 무척이나 궁금했을 게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친척들의 권유로 누이의 시가가 있는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3학년으로 ‘유학’을 가게된 호암도 훗날 비슷한 소회를 남겼다. 몇 달에 불과한 도시 생활이었지만 호암에게는 큰 경험이엇던 듯 하다. 호암자전에 “공자는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다고 했고,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했다고 한다. 불과 몇달 안되는 짧은 동안이었지만 진주에서의 생활을 경험하고 귀성한 나로서는 태어나서 자란 중교리는 너무나 좁고 답답한 곳으로 느껴졌다”고 썼다.

한 학기를 보내고 방학을 맞아 귀성한 호암은 마침 내려온 재종 형의 이야기를 듣고 더 큰 결심을 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떼를 썼고, 귀한 아들의 깊은 뜻을 인정한 부모의 허락을 얻어냈다.

서울에서 수송보통학교와 중동중학교를 거친 호암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입학했지만 병환으로 2학년 가을 무렵 대학을 중퇴한다. 고향으로 돌아와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여러가지를 시도했다. 당시 농촌에는 생소하던 고등소채(高等蔬菜)를 일본에서 들여오고 개량 돼지와 닭의 원종도 들여와 봤지만 그저 취미 수준이었다.

오히려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친구들과 골패에 열중했다. 당시에 대해 호암은 “운이 없는 것일까, 세상이 나쁜 것일까, 자성과 자제를 잃은 무위도식의 나날이 한동안 계속되었다”고 회고한 적 있다.

하지만 그의 타고난 사업가 본능은 더이상 ‘깊은 잠’을 허락치 않았다. 무위도식을 반복하던 어느날, 그는 ‘사업에 나의 인생을 걸어보자’고 결심한다.

호암은 이때의 결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는 있을 수 없다. 실업자가 10년동안 무엇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치자. 그 십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는 십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문 앞에서 그저 전전긍긍 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청년세대들이 새길 만한 대목이다. 

중교리 생가는 그가 피곤하고 지칠때 휴식을 줬고, 방황할때도 침묵으로 함께 하는 친구가 돼줬고, 사업가 영감을 심어준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었다. 생가를 탈출(?)한 호암은 그렇지만 늘 중교리를 그리워했고, 생가에서의 얻은 교훈을 평생 간직하면서 경영에 접목했다. 논어와 함께 한 생가는 그에겐 위로였고, 영감의 창고였다.

sw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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