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 일간지에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의 회고록이 실렸다. 이 글을 읽고 격한 감정을 보인 이들이 있다. 옛 대우그룹 최고경영자들이다. “대우는 시장의 신뢰를 잃어 망했다”는 표현 때문이었다. 김우중 회장은 아직 말이 없지만, ㈜대우의 마지막 대표로 현재는 옛 대우인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이끌며 김우중 회장의 대리인 역할을 맡고 있는 장병주 회장은 매우 격한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대우의 공과 과를 얘기했으나 결국 거침없는 작심 발언을 토해냈다. 대우의 몰락에는 대우인의 책임이 컸지만, 정부와 정치권의 오판과 음모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당시 정책결정자였던 몇 명에 대해선 극도의 분노감까지 표출했다. 그러면서도 “대우는 몰락했지만 도전과 패기로 똘똘 뭉친 제2, 제3의 김우중이 나오길 진심으로 원한다”고 말했다. 김우중 회장과 대우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는 장 회장을 영풍빌딩 그의 사무실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사무실에서 4월 27일과 5월 11일 두 차례 만났다.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 |
▶대우가 지난 1999년에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10년이 된 2009년에 대우 임원 출신의 친목단체인 대우인회에서 ‘이러다간 대우라는 이름이 없어지겠다’ 싶어 출간을 서두르게 됐다. 이 책에는 대우그룹 임원 출신 33명의 글이 실려 있다. 다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전과 창조, 희생의 대우정신을 젊은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5년 후면 대우 설립 50주년이다. 돌아보면 안타까운 점도 많을 것 같다.
▶서울역 앞 대우센터 건물을 아는가? 대우는 물론 우리 경제성장의 심벌이었다. 시대의 상징이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라면 주인이 바뀌어도 이름까지 바꾸진 않았을 것이다.(현재 이 건물은 서울스퀘어로 이름을 바꾸었다.)
-추징금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거액의 추징금을 맞았다. 무려 23조원에 이른다. 김 회장이 19조원이고 나도 3조8000억원이다. 외환관리법에는 외국에서 빌린 돈은 외국에서 갚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해외에서 돈을 빌리려면 본사 지급보증이 필요했다. 그래야 싸게 빌릴 수 있었다. 할 수 없이 편법으로 본사에서 돈을 빼 보내주었다. 이것이 해외 재산도피로 몰려 거액을 추징당한 것이다. 또 외국에서 돈을 빌릴 때는 한국은행에 신고해야 했는데 신고 못한 게 많았다. 우리 불찰이었다. 그러나 당시 법정에서도 우리에게 내린 추징금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은 인정했다.
-‘대우’ 이름을 단 기업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
▶포스코가 지난해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했다. 그런데 기업문화나 사업 스타일이 너무 다르다. 예를 들어, 포스코는 상당부분 회장 결재까지 받는데, 대우는 팀장이 몇 천억원짜리도 결재했다. 그리고 무역회사는 사람 장사인데, 해외 발령 한 달 만에 나가라는 게 말이 되는가.(포스코는 대우 출신 30여명을 구조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대우조선이나 대우건설 대우인터내셔날 등은 모두 여전히 1등 회사이다. 채권단이 그동안 해준 게 뭔지 묻고 싶다. (일 터진 후에) 유동성을 메워준 것 외에는 없다. 나머지는 대우 사람들이 열심히 목숨 걸고 뛰어 정상화시켰다. 워크아웃 때 미리 그룹에 유동성을 지원해 주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은 “㈜대우에서 무역부문을 떼어 없애라”고까지 했다.
-당시 정책 당국에 아쉬움이 많을 것 같다. 이헌재 회고록에 ‘대우가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는 내용도 그렇고.
▶정부는 반성을 많이 해야 한다. 최근의 저축은행 사태도 한번 봐라. 신용금고 잘 하던 사람들을 갑자기 저축은행 만들라고 하고 프로젝트 파이낸싱(PF) 허용했다가 다 망가트렸다. 그리곤 오너를 비롯해 기업 잘못만 얘기한다. 정책 실패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다. IMF 외환위기가 왜 왔나. 단자사를 종금사로 전환해 외환을 취급할 수 있게 해준 때문이다. 3개월짜리 자금 빌려다 동남아에 장기저리로 대출해주니 미스매치가 생긴 것 아닌가. 그 중간에 기아나 한보사태도 있었다. 결국 모두 기업이 잘못해 그렇게 됐다고 책임지웠다. 기업들 때문에 외환위기 초래했다고 했다. 안 될 말이다. 외환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가 대우 아닌가.
-당시 대우의 높은 부채비율에 대해선 논란이 많았다.
▶대우 같은 회사는 해외사업을 하느라 부채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고금리에 외국계 은행은 갚으라고 난리고 국내에선 자금조달이 안 되고… 대우는 내수기업이 아니었기에 내다팔 부동산도 없었다. 그런 특수성을 인정했어야 했다. 해외차입도 안 되고 국내 조달 길도 (정부가) 막아버리니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우리 잘못도 컸다. 그렇지만 정부와 은행이 “어느 기업은 시장신뢰를 잃었다”고 한마디 하면 그것으로 그 기업은 끝이다. 그때 그래 놓고는 이제와선 “우리가 도와주려고 했는데…”라고 얘기한다.
-김 회장은 이헌재 전 위원장의 ’대우 시장신뢰’ 발언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었나?
▶상당히 불쾌해 했다. 다시 얘기하지만 당시 정부는 대우의 모든 자금줄을 막아놓고 있었다. 노무라증권이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고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 회장은 대우가 잘못돼 노무라 보고서가 나왔다기 보다는 정부가 만든 그런 상황 때문에 노무라 보고서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외환위기 당시 전경련 회장이던 김 회장이 DJ(김대중 대통령)를 만났는데 성과가 없었나?
▶김 회장은 일시적 외화 유동성 부족이라고 봤다. 환율이 높으니 수출이 잘 될 것이니 무역수지 늘려 유동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정부는 이를 외면했다. (이때 장 회장은 국회의원인 강봉균 당시 경제수석 이름을 올리며 독설을 내뱉었다. DJ는 이해했는데 강 수석이 틀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자동차 등 대부분이 수출환어음(DA)을 취급한다. 물건을 먼저 선적하고 은행에서 돈을 받는 구조다. 수출이 많아질수록 한도를 높여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연불수출도 여의치 않았다. 협력사 생존의 문제가 걸린 문제라 결국 우리 돈으로 자동차 등에 지급해 주어야 했다. 그러니 수출하면 할수록 우리 유동성 부족만 나빠진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해 우리 대우만 140억달러의 무역흑자를 올렸다. 국가 전체로도 400억달러가 넘었다. 정부는 20억달러를 전망했었다. 대우가 옳은 거였다.
-대우가 불이익을 당했다고 보는가?
▶대우 사태 이후에 현대그룹에서 문제가 생겼다. 누구도 현대 채권을 인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정부가 ‘채권신속인수제’라는 제도를 만들어 현대를 살려주었다. 형평성에 문제가 있었다. 대우의 책임을 피하긴 어렵지만, 대우를 이렇게 만든 데는 당시 정책 당국자들의 책임도 크다. 진념 이헌재 강봉균 전윤철 등 당시 정책 결정자들은 “대우가 시장의 신뢰를 잃었기에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나쁜 사람들이다. 특히 강봉균 수석이 가장 심했다. 오죽했으면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도 DJ와 독대를 한 번밖에 못했다고 했을까. 김 회장 한테는 해외로 나가 있으라고 해놓고, 그 사이에 일처리 다 해놓고는 “회장이 안 들어와 어쩔 수 없었다”고 보고한 사람들이다. 분식 규모도 뻥튀기했다. 2년치를 합쳐 40조원이라고 발표했다. 지난해 분식이 10조원면 이듬해는 이월해 합산해야 하는데 두 해 것을 합쳐서 부풀렸다. 대우가 분명히 과는 있지만, 사실은 정확히 짚어야 하고 공도 객관적으로 봐 주어야 한다.
-김 회장도 그룹 해체 당시 그들에 대해 ‘나쁜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안다.
▶담보 넣으라고 해 다 해주었는데 워크아웃으로 지분 다 빼았고 그것도 모자라 개인 재산 달라며 집까지 빼았았다. 총수 집까지 빼앗긴 경우는 대우밖에 없다. 그것도 방배동 집과, 작고한 장남(선재 씨) 묘가 있던 안산 농장은 빼주겠다고 해 재산목록에서 뺐는데, 나중에 검찰이 “은닉재산 찾아냈다”며 대대적으로 발표해 창피를 주었다. 그 집과 땅은 당초 빼주기로 했던 것이었다고 얘기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대우도 상당한 액수의 공적자금을 받은 것으로 안다.
▶자산관리공사가 공적자금을 받아 각 은행에 배분했던 것으로 안다. 그 가운데 일부를 대우 용도로 쓴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당시 대우조선 대우건설 등에 투입된 공적자금보다 실제 회수된 액수가 더 많다. 확인해 봐라. 그만큼 대우의 가치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얘기다.
-최근 김우중 회장이 국세청으로 부터 거액을 추가 추징당했다. 은닉 재산이 더 있다는 얘기인가?
▶대우그룹이 99년에 워크아웃에 들러가면서 김 회장이 대출담보로 제공했던 개인 소유 재산 1조3000억원(1999년 당시 시세)이 채권단에 넘어 갔다. 은행들이 채권 회수를 위해 이를 경매처분한 이후에 아무 소유권도 없는 김 회장에게 양도소득세와 종합소득세가 부과된 것이 체납되어 163억원까지 불어났다. 1000억원 은닉재산 운운하는 것도 거짓말이다. 2008년 초 세금체납을 이유로 국세청이 김 회장을 출국금지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풍연 사건으로 문제가 되었던 주식(액면가 776억원, 자산관리공사 평가액 2000억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국세청에도 충분히 소명해 이해를 구했던 사안이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 유찰되면서 매각에 차질을 빚어 체납 세금 문제가 정리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 뿐이다. 그런데도 마치 김 회장을 악덕기업주로 몰고, 몰래 빼돌린 재산을 찾은 것 처럼 발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김우중 회장의 근황은 어떤가? 재기 혹은 복귀설이 솔솔 나온다.
▶김 회장은 올해부턴 두 달에 한 번 정도 한국에 들어올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사업 재개 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재산도 없다. 나이도 벌써 80을 바라본다. 지금은 세계경영연구회가 주관하는 영 비즈니스 리더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도 베트남에서도 39명 연수생에게 직접 특강을 하고 있다. 눈을 돌려 해외에서 일자리와 창업의 길을 찾으라고 주문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김우중사관학교’라고 부른다. 이들이 창업하면 수천 수만명 취업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다 보면 ‘작은 김우중’도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웃음). 얼마 전 일본 온천에 같이 다녀온 적이 있다. 김 회장이 그때 ‘온천은 처음’이라고 말하더라. 평생을 그렇게 쉬지 않고 일만하고 달려온 분이다. 제2, 제3의 김우중이 나오길 원하신다. 자신이 일궜던 대우 세계경영의 현장도 한번 다시 둘러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김 회장이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
▶연세(1936년생)가 있으시니 회고록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되지만, 아직 생각은 않고 있는 것 같다. 올해가 대우 창립 45주년 되는 해이다. 5년 후면 50주년이다. 늦어도 그 전 까지는 회고록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 회장의 어떤 면을 국민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나.
▶김 회장은 국가관과 역사관이 투철했다. 우리 문화 스포츠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축구협회장을 맡아 회사 차원의 지원 말고도 개인 재산을 많이 지원했다. 특히 한국 바둑이 이 만큼 성장한 데는 김 회장의 공이 크다. 한국기원 총재직을 맡았을 당시, 전문기사들을 기업체에 취직시켜 줘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대우재단도 재벌 오너 가운데 처음으로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다른 그룹 총수들은 김 회장을 비난했다. 자신들도 그렇게 해야 할 테니까. 당시에는 그랬다.
-마지막으로 정책 책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는 산업정책이 없다. “굴뚝산업이 뭐 필요있느냐, IT 키우면 된다”는 식이었다. 너무 금융만 키우려 했다. 결국 일자리 창출도 안 되고… 모든 게 그것이 원인이었다.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지식경제부(옛 산업자원부)의 목소리도 너무 작아졌다. 이렇게 돼선 안 된다.
부국장 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