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에 기반한 작품 ‘행복한 눈물’을 비롯해 난해하기 이를데 없는 수천억원대 그림들이 등장했던 지난 2007년 삼성 비자금 사건을 필두로,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그림 로비 사건, 오리온 회장의 비자금 사건, 부산저축은행 사태까지 미술품은 빠짐없이 등장 중이다. 게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불법, 탈법의 온상’인 이번 미래저축은행 비리의 배후에도 고가 그림들이 ‘나 여기 있소’ 하듯 드러났다.
이처럼 불법 사건에 미술품이 단골로 등장하는 것은 고가의 미술품이 지닌 재화로서의 가치 때문이다. 물가상승률에 턱없이 못 미치는 저금리, 극심한 부동산 침체와는 달리 알짜 그림은 그 수익성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현존 작가 중 가장 그림값이 비싼 데미안 허스트(47ㆍ영국)가 “그림은 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통화”라고 기염을 토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실제로 앤디 워홀, 게르하르트 리히터, 사이 톰블리,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세계적 거장의 작품은 20여년 전에 비해 약 10~100배 올랐다. 1990년대 초 24만달러(약 2억7000만원)에 불과했던 루이스 부르즈아(작고)의 거미 조각 ‘마망’의 경우 현재 500억~1000억원을 줘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게 비근한 예다.
세계적인 슈퍼리치들이 유명작가 수작을 너도나도 보유하려 하기 때문에 이렇듯 미술품 가격은 수직상승 중이다. 최근 씨티은행이 발표한 ‘2012 부(富)보고서’에 의하면 재산 1억달러 이상의 슈퍼리치는 6만3000여명(아시아가 가장 많아 2만1000명, 북미 1만7000명, 유럽 1만7000명, 남미 5000명, 중동 2000명 순)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10~20%는 ‘미술품’을 투자 포트폴리오에 포함시키며 연 40조원대의 글로벌 미술시장을 형성 중이다.
게다가 최근 6,7년 새 카타르 등 중동의 오일부자와 중국 및 러시아 신흥부호들이 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투자대상으로 미술품을 점찍고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어 가격 상승이 더욱 가파르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 또 예술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미술품처럼 ‘딱’ 떨어지는 대상이 없는 것도 그 이유다. 국가 부설기관이 앞장서서 경매사를 운영 중인 중국에선 고가의 미술품이 ‘가장 우아한 뇌물’(경매낙찰가가 찍힌 보증서를 곁들여)로 각인되고 있을 정도다.
오래 전부터 국내 미술품경매사 등에선 “박수근 대표작은 1년에 약10%, 중국 유명작가 그림은 10년에 10배 상승을 보장한다. 은행금리는 댈 게 아니다”며 작품 구입을 독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미술품은 부동산처럼 등기부등본이 없어 은밀한 상속 및 증여가 경우에 따라선 가능한 것도 온갖 사건에 그림이 단골로 등장하는 이유다. 전문가가 아니고선 진위 판별, 가격 산정이 어려운 것도 세금 회피를 가능케 하는 요인이다. 내년부터 정부가 6000만원 이상의 작고작가 작품 거래 시 양도세득세를 부과키로 했으나 추적이 쉽지 않아 고작 20억~30억원의 세수가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화랑 간판을 내걸긴 했으나 부자들을 상대로 하는 프라이빗 딜러로 활동해온 갤러리서미 홍송원(59) 대표처럼, 향후 오를만한 미술품을 족집게처럼 집어내 구입을 권유하는 이들이 국내에 적잖이 포진해있는 것도 ‘감상과 예술 후원의 대상’으로 봐야 할 미술품을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한 요인이다.
미술과 관련된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홍 대표는 국내 화랑으론 유일하게 지난 2007년 이래 연 1000억원대(국내화랑 중 매출 1위, 2007년 1466억원, 2008년 950억, 2009년 921억원, 2010년 1216억원, 2011년 991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작가 발굴 및 전시 등 화랑 본연의 역할 보다는 상위 0.1% 부자들의 아트투자 컨설팅에 주력해온 아트 딜러이다.
그가 유명작가의 그림과 조각, 사진을 뉴욕, 런던 등 해외 경매와 정상급 화랑에서 현금을 내고 사들여와도 이를 구입하는 국내 최상위 부유층들은 "일단 그림을 놓고 가시라"고 한 후 수개월이 지나야 비로소 대금을 결재하거나, 도로 물리는 예가 마치 관례처럼 통용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매출은 국내 화랑 중 가장 많이 올리면서도, 늘 유동성(현금) 압박을 받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홍 대표가 미래저축은행에 대출을 받으며 담보로 잡혔던 사이 톰블리의 대표적인 추상화 대작 ‘무제’(부제 ‘볼세나’:이탈리아 Bolsena지역에서 1969년에 그린 14점의 연작 중 하나로 11일오전(한국시간) 뉴욕 필립스 드 퓨리 경매에서 수수료 포함해 약72억원에 낙찰) 등은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하나캐피탈에 증자를 유도하며 마치 자기 소유처럼 그림을 넘기는 등 ‘불투명한 거래’에 쓰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 그림은 뉴욕 필립스 경매의 ‘컨템포라리 아트 세일’에 주요작품으로 출품(추정가 600만~800만달러)돼 낮은 추정가 범위에서 판매됐다.
하나캐피탈은 미래저축은행의 김찬경 회장이 그림을 담보로 증자를 요청해오자 이 난해한 추상회화를 포함해 박수근,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손에 넣고 유상증자를 했다. 담보물건 중 사이 톰블리와 박수근 그림은 지난 3월(서울옥션 경매, 박수근 그림 2점)과 오늘자(필립스 드 퓨리 뉴욕경매)로 매각됐다.
이렇듯 미술품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문화예술적 ‘감상(美)의 대상’이자, 때론 ‘투자의 대상’으로 매우 예민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상반된 속성으로 인해 미술품은 요즘들어 아쉽게도 추악한 소용돌이에 자주 휘말리고 있다.
글=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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