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화가’ 전준엽 작가가 국제무대에서 각광받고 있다. 지난해 미국 마이애미와 홍콩의 유력 화랑, 또 뉴욕의 갤러리로부터 개인전 초대 및 아트페어 출품 제의가 줄을 잇고 있다. ‘내 작품에 관심을 가져 달라’며 작가가 직접 발벗고 뛴 적이 없는데도 제안이 이어지니 놀랄 수밖에.
이에 전 작가는 “전 세계를 물들이는 K-팝 열기와 한국의 높아진 위상 덕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 K-아트(Art)로 지금의 열기가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다. 어깨가 무겁다”며 공(功)을 다른 데로 돌렸다.
화가 전준엽의 작품은 그동안 국내와 일본, 독일에선 그런대로 인기가 있었다. 꾸준히 작품을 사는 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미국과 홍콩의 굴지 화랑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전혀 모르는 갤러리스트들의 잇딴 제안에 그 자신도 놀랬다. 외국 화랑들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더 K 갤러리(대표 티나킴) 웹사이트에 올려진 전준엽의 그림을 보고, 그의 전시를 열고 싶다며 제안해오고 있다.
지난해 11월말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렸던 ‘레드닷 마이애미’ 아트페어에 참가했던 전준엽은 현재 홍콩의 소타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열고 있다. 이달 2일 개막된 그의 개인전은 4월말까지 한달간 이어진다. 오는 6월에는 마이애미에서, 10월에는 뉴욕에서 개인전을 연다. 뉴욕 크리스티의 현대미술 경매(9월)에도 출품할 예정이다. 최근들어 해외 전시및 페어 참가가 봇물을 이루고 있는 것.
인천에서 태어난 전준엽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지만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때문에 미술대학 진학을 망설였다. 고교 1년 때는 학교를 그만두고 절에 들어가기도 했다. 스님의 만류로 돌아오긴 했지만 많이 방황했던 시기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이 “내가 못 이룬 예술가의 꿈, 네가 한번 이뤄 봐라”며 미술학원에 등록을 해줬다. 그 때 만난 스승이 호남 출신의 유명 화가 최쌍중 선생이었다. 중앙대 서양화과에 들어간 전 작가는 1학년 때 ‘목우회 공모전’에서 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승(최쌍중화백)의 화풍을 흉내 내선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없음을 간파하고 자신만의 조형 방식을 찾기 시작했다. 대상을 터럭 한 올까지 묘사하는 극사실 작업도 시도했고, 민중미술가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구호와 주장를 앞세운 ‘날 선’ 민중미술에 회의를 느낀 그는 빛과 자연을 담는 순수미술로 전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림만으론 생계를 꾸릴 수 없어 고교 교사, 일간지 문화부 기자, 미술관 큐레이터 등으로 20여년간 활동해온 그는 8년 전인 2004년에야 전업작가가 됐다. 현재 전 작가의 팬은 그 층이 제법 두텁다. 그의 그림을 한점 장만한 사람은 대부분 1, 2점씩 더 구입하곤 한다.
“도쿄 긴자의 한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 때였죠. 30대 초반의 여성이 점심 무렵이면 전시장을 찾아 제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가곤 했어요. 열흘 내내요. 폐막일에 그녀가 어렵사리 말을 꺼내더군요. 근처 백화점의 판매원이었던 그녀는 ‘작품값이 40만엔 이상인데 수중에 30만엔밖에 없다’고 말이죠. 그래서 흔쾌히 그림을 내줬죠. 그 여성이 지금도 연하장을 보내와요. 벌써 10년이 됐네요”
이 일본 여성처럼 전 작가에겐 애틋한 사연의 고객이 여럿 있다. 박봉의 직장인들이 그의 그림을 오래오래 마음에 품었다가, 어렵사리 사가는 예도 많다. 이들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더욱 담금질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지금까지 팔린 전 작가의 작품은 900여점. 이 중 100여점은 일본에서, 100여점은 미국과 유럽에서 판매됐다. 나머지 700여점은 국내에서 팔렸다. 큰손 고객이나 기업 고객보다는 대부분 개인 고객이 샀다.
전 작가의 그림은 서양화 재료(유화물감)로 작업했지만 번쩍거리지 않는 게 특징이다. 기름기 대신 맑고 깨끗한 기운이 감돈다. 푸른 물이나 폭포에선 청량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우리 식의 풍경화’를 지향하며 끈질긴 실험과 도전 끝에 산수화의 조형어법을 화폭에 끌어들였고, 그래서 ‘서양 재료로 그린 동양화’로 불린다. 작품명은 ‘빛의 정원에서’다. 빛은 물리적 광선이 아니라 ‘희망’을 뜻하고, ‘정원’은 우리의 땅과 풍토, 곧 정신적 마당을 상징한다.
단순해 보이는 그림이지만 전준엽의 작업은 꽤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린다기 보다는 만들어가는 ‘조형’에 더 가깝다. 캔버스에 물감을 입히고, 입으로 불고 긁고 갈아내기를 반복하는 까다로운 ‘발효의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은은한 발색의 미감이 살아난다. 그의 작품을 소장한 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청량감이 살아난다”고 반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양화이면서도 동양적 사유와 철학이 배어 있는 그의 그림은 허허로우면서도 꽉 차 있고, 꽉 찬 듯하면서도 허허롭다. 서양의 미술 관계자들이 매혹되는 지점이다. 자기네 화가들에게선 보기 힘든 여유로운 서정과 차가운 청량감이 담겨있어 연달아 손을 내미는 것이다.
전준엽의 가족은 예술패밀리다. 아내는 붓글씨를 쓰며, 두 아들 또한 예술에 재능을 보이고 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온 큰아들(전민재)은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세계 최연소로 작곡부문 대상을 받았고, 둘째(전영재) 또한 대학에서 도시환경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평범함과 기본 속에 진정한 예술이 있다’고 믿으며 오늘도 하루 꼬박 10시간씩 굽은 노송과 푸른 하늘, 돛단배, 설중매 등을 정성껏 그리고 있다. 미술계를 휩쓰는 현란한 유행에 아랑곳않고, 진득하게 자신만의 작업을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간 K-아트가 K-팝처럼 세계인의 뜨거운 사랑을 받을 날을 꿈꾸며...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ㆍ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