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복원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한형준 제와장의 직속 후계자인 김창대(40ㆍ오른쪽) 전수조교다. 우직한 경상도 억양으로 “선생님 몸도 안 좋으신데, 밖에 너무 오래 계셨다”며 제와장과의 인터뷰를 끊던 그 남자다.
부산에서 공무원을 하던 김 전수조교는 1998년부터 한 제와장 밑에서 조선 기와 제작법을 배우고 있다. “1년만 배워볼랍니다”했는데 15년째다.
“가마를 사용할 때는 늘 보수작업도 함께 갑니다. 가마 안 온도가 1000~1100도까지 올라가니까 당연히 쩍쩍 갈라질 수밖에 없죠.”
김 조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가마 위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황토와 마사를 반반씩 섞어 덧바르고 망치로 두드린다. 함께 작업 중인 전통문화학교 후배들에게 틈틈이 조언도 잊지 않는다.
기와 제작을 배우기 시작한 지 15년이 다 돼서야 직접 눈으로 불의 온도를 잴 수 있는 ‘불 보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김 전수조교는 숭례문 복원작업에 참여하게 될 줄을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사실 숭례문이 그렇게 타버릴 줄 몰랐다는 게 정답일 게다.
“선생님이 밥도 못 먹는 일이라고 해서 처음엔 안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죠. 그러다가 ‘내가 밥은 먹여주마’하시며 선생님댁에 머물면서 배우게 하셨어요.”
그 ‘밥’은 하루 세끼이기도 했고, 돈벌이의 의미이기도 했다. 1998년부터 한 제와장 집에서 매일 공짜밥을 먹었고, 전수조교가 돼 숭례문 복원사업에 참여하게 됐으니 한 제와장은 두 가지 ‘밥’ 약속을 모두 지킨 셈이다.
딸만 여섯인 한 제와장에게 김 조교는 새로 생긴 아들이기도 하다. 몸이 불편한 한 제와장을 대신해 손과 발 역할을 한다. 부여 전통문화학교 가마터에 늘 차로 직접 모셔다 드리고, 서울 숭례문 현장에서 열리는 행사에도 반드시 함께 움직인다.“이제서야 불 보는 법도 배웠어요. 기와에 빠져 사는 동안 장가도 못 갔죠. 그래도 이만하면 밥값하며 사는 것 같은데, 선생님은 늘 ‘장가 안 가냐’고 하시죠. 그때까지는 밥값 못하는 거라네요.”
<박동미 기자@Michan0821>/pd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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