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스완’이 아닌 ‘화이트스완’ 시대가 도래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는 상시 위기 체제로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예측불허의 상황은 달러의 위상 변화와 중국 위안화의 부상, 유로화 등의 변수가 가세하면서 더욱 방향을 잡기 어려워졌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고는 국가경제는 물론 개인의 삶까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독일 재정ㆍ통화 전문 저널리스트인 다니엘 D. 엑케르트는 화제의 저서 ‘화폐 트라우마’(위츠)에서 이런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넓은 시야와 균형적 시각을 제시한다. 이전의 화폐전쟁을 다룬 많은 저서들이 달러화 대 위안화에 치중한 반면, 이 책은 달러화, 위안화, 유로화의 삼각관계 속에서 좌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특히 저자가 ‘트라우마’라는 심리적 관점에서 화폐의 역사를 짚어내고 향후 정책방향을 제시한 점은 신선하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상처이자 현재와 미래의 두려움이다. 따라서 트라우마를 보면 그 나라의 행동방식이 보인다는 논리다.
우선 미국의 트라우마는 대공황이다. 대공황은 아메리칸 드림을 가장 크게 뒤흔들어놓은 사건이었다. 산업생산량이 50%가량 줄어들었고, 남성 인구의 4분의 1이 실업자 신세가 됐다. 유전자에 깊이 새겨진 대공황의 참담함은 긴축정책에 대한 두려움을 잉태시켰다. 미국인들은 대공황 당시 국고와 돈줄을 죈 게 경기 후퇴를 가속화시켰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의 정책은 인플레이션으로 일관한다.
저자는 향후 몇 년 안에 미국이 선택의 기로에 놓일 것으로 본다. 국가재정 건전성을 추구하면서 이에 수반되는 디플레이션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 아니면 인플레이션을 용인하며 부채를 탕감할 것인지 판단해야 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트라우마 탓에 미국은 달러정책을 점진적인 가치하락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미국이 원하는 것만큼 온건한 수준을 넘어설 경우 달러의 종말이 예고된다.
반면 중국의 트라우마는 지난 100년간 전쟁과 내전, 혼란의 역사에 각인된 화폐혼란이다. 과거 중국에서 화폐는 현기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빠른 속도로 교체됐다. 존속기간이 10년이 안 된 것도 있다. 화폐가 귀중한 재산인 동시에 위태로운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중국인들의 화폐공포증은 10년 전 아시아 외환위기 속에서 자국 화폐를 방어해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바뀌었다.
때문에 중국은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한 길을 모색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의 붕괴를 추구할 것으로 저자는 내다본다. 지정학적 요인은 위안이 준비통화로 떠오르는 것을 가로막는 유일한 걸림돌은 아니란 것. 근본적 장애물은 중국 금융 시스템의 낮은 발전 수준. 다양하고 유동성이 풍부한 자본시장이 구축돼야 하며 중국 10년 안에 이 두 가지 일에 착수할 것으로 본다. 그 중심에 상하이(上海)가 있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으로 자본이 몰리면서 조금이라도 위안화 절상이 이뤄질 경우 일본처럼 거품경제가 형성된 후 한순간에 붕괴될 수도 있다.
유로의 트라우마는 독일이다.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이기 때문이다. 유로존을 이끄는 독일의 트라우마는 세계대전 이후 경험한 하이퍼인플레이션. 전 세계 모든 나라를 통틀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집단 기억 속에 흔적을 남긴 나라는 독일이 유일하다. 따라서 독일은 경제위기에 직면했을 때에도 반드시 긴축재정을 펼칠 것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금이 가진 독특한 지위에도 주목한다. 금 펀드, 금 ETF 등에 투자해 자산을 보전하는 민간 금본위제로 금은 그 지위를 유지할 것이란 얘기다.
이 책은 중국, 미국과 여러 측면에서 얽혀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저자 또한 이를 의식, 한국어판 서문을 별도로 달았다.
그는 한국은 경제적으로 친밀한 미국과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중국 사이에서 자칫 이용당한 후 용도폐기될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화폐전쟁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경제적으로 싱가포르처럼 명민하게 흐름을 타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1, 2차 세계대전 당시 스위스처럼 주도면밀하게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화폐트라우마/다니엘 D.엑케르트 지음, 배진아 옮김/위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