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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끊이질 않는 박태준 추모물결 ... 왜 박태준을 흠모하는가

 

“왜 이렇게 묘소가 초라해요….”

지난 19일 국립서울현충원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묘소 앞. 부산에서 먼길을 올라온 김명자(53ㆍ주부) 씨가 “국무총리까지 지내신 분의 묘소가 너무 초라해 놀랐다”며 울먹였다. 생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고인의 묘소 앞에서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다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장미가 묘소 주변에 많아 그나마 위안이 되네요”라며 어렵게 발길을 돌렸다.

같은 날 황종현(70) 전 포항스틸러스 단장도 먹먹한 표정으로 묘소 앞에 서 있었다. 박 명예회장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는 듯 좀처럼 묘소 앞을 떠나지 못했다. 올해 칠순을 맞았지만 칠순잔치는커녕 자식들이 보내준다는 해외여행도 마다하고 매일 그분의 묘소를 지키고 있다. 박 명예회장 생전 50여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황 단장이지만 아직 그를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황 전 단장과 함께 포스코 재직 시절 박 명예회장을 지근에서 보좌했던 전창식(50ㆍ자영업) 씨와 외조카 장병기(54) 씨도 이날 묘소 앞 천막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이용덕 서울대 조소과 교수는 박 명예회장의 옆모습을 부조로 깎고, 그 옆에 ‘짧은 인생을 영원히 조국에’라는 고인의 좌우명을 새겨넣은 묘비로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대신했다. 

박 명예회장과 각별한 인연이 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조문도 끊이지 않고 있다. 유족들은 조문객들을 위해 마련한 묘소 앞 천막을 삼우제(三虞祭)까지만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자 100일로 연장해야 했다.

요즘도 평일에는 40~50명, 주말에는 200~300명의 조문객이 고인의 묘소를 찾고 있다. 지난해 12월 박 회장의 영결식 이후 묘소를 찾은 시민은 무려 6000여명에 이른다. 이들 중에는 박 명예회장이 포스코 재직 시절 활동 무대였던 포항, 부산 지역에서 먼 거리를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고, 박 회장과 연고가 없는 강원 지역에서 조문을 오기도 했다. 


국립서울현충원 관계자는 “유명 인사의 조문 행렬을 위해 묘소 앞에 천막을 설치 운용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박 명예회장처럼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전했다.

왜 이들은 고인을 잊지 못하고 묘소를 찾는 걸까. 포항에서 올라온 신이범(68ㆍ수산업) 씨는 ‘그분의 청렴한 성품’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밖에 안 남은 집마저 사회에 환원해 말년에 자식들의 도움으로 살았다는 보도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전당대회 돈봉투 파문이니, 대기업 횡령 조사니, 정ㆍ재계 모두 비리로 얼룩진 세상에서 고인은 진정으로 이 시대에 귀감이 되는 분”이라고 존경심을 표했다.

불의와 타협 않는 강직함, 그리고 맨땅에서 철강산업을 부흥시킨 그의 시대적 사명감과 추진력도 시민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윤성진(55ㆍ회사원) 씨는 이날 딸의 졸업식을 위해 창원에서 올라온 처제 부부와 함께 일부러 묘소를 찾았다. “서울에 올라온 김에 의미 있는 분의 묘소를 찾아보자고 권해 여기까지 왔다”면서 “허허벌판에서 우리나라 중공업을 일궈내신 분인데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나”고 말했다. 


그는 “박 명예회장께서 폐 수술을 받을 때 폐에서 시멘트 가루가 나왔다고 들었다”며 “자신이 세운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느라 현장에 오래 있다가 병을 얻은 것 같아 가슴이 찡했다”고 전했다.

화려한 봉분이 아닌, 국가 규정에 맞는 협소한 묘소에 몸을 뉘었지만 그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찾아오는 시민들과 그들이 봉헌한 장미꽃ㆍ호접란 덕분에 고인의 묘소는 결코 외롭거나 초라하지 않았다.

<신소연 기자@shinsoso>
carri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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