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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한상상력의 아이콘, 이기태
‘애니콜 신화’스타 CEO서 대학 연구소장으로 대변신…‘창의적 인재양성’두번째 신화창조에 나서다
1973년 소박한 꿈으로 들어간 삼성전자. 특출난 학벌도 없던 내게 그곳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자유로운 조직이었다.

사람들이 “이기태가 물 먹었다”며 코웃음 쳤던 무선사업 이사직 발령.

‘애니콜 신화’는 부족함을 상상력으로 채운 남모를 땀방울이 빚은 결과물.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와 두번의 만남…IT미래에 대해 잡스는 PC, 난 모바일 택해. 아이폰 대성공을 보면 아이로니컬하게 그 때가 생각나.

강단에선 학생들에게 ‘논리적인 상상력’을 강조한다. 결국 미래지향적 가치란 능력보다 통찰력과 도전정신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

그는 기독교 신자다. 그런데 점심을 겸한 3시간 동안 ‘무소유’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툭툭 튀어 나왔다. 그에게 무소유란 ‘무한한 상상’과 동의어였다. 투박하고 거침없는 말투 속에서 그만의 철학과 ‘무한한 비전’이 담겨 있었다. 

현재 근무하는 대학연구소의 키워드도 R&D(연구개발)가 아닌 I&D(상상력 개발; Imagenation & Development)라고 말한다. 삼성에서 가장 성공한 샐러리맨으로 꼽히는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현 연세대학교 미래융합기술연구소장)이다.

그를 말할 때면 항상 ‘애니콜 신화의 주역’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닌, 조직이 한 것”이라며 껄끄러워 했다. 팀워크와 시스템이 만들어 낸 성과라는 것이다. 스타 CEO로 가득한 삼성전자에서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을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오늘날 삼성전자 휴대폰을 만든 밑거름이 됐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애니콜 신화’를 이끈 삼성전자 대표 CEO에서 연세대 미래융합기술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긴 지 벌써 햇수로 2년. 이기태 전 부회장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살아있는 기술을 만들 젊은 창의적 영재들을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삼성 그리고 이기태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샐러리맨 성공 신화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난 특출난 사람이 아니예요. 내 고생은 고생도 아닙니다”라며 손사래부터 쳤다. 석사나 박사학위도 없는 평범한 학벌에다, 초고속 승진도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매일 열심히는 했어요. 순간 최선을 다하고.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방법, 어떻게 회사에 기여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만의 성공철학이다.

“남보다 10분 먼저 자리에 앉고 공동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제안하고, 조직에 공헌해야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누가 진급시키겠습니까?”

젊은 이기태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일 고집이 세고, 윗사람 눈치 안 보기로 유명했다. 때론 상사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사표를 낸 적도 있었던 것 같다고 말을 흐린다. 그러나 일 할 때는 언제든 ‘더 잘할 수 있는 방법, 회사가 잘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했고 실행에 옮겼다.

그가 삼성전자에 입사한 것은 1973년. 꿈은 소박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탓에 단지 돈을 좀 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릴 땐 전업사 사장이 되고 싶었어요. 당시 우리 동네에서 돈을 많이 벌었거든요. 졸업해선 먹고 살려고 취직을 했는데, 삼성이 제일 좋다고 해서 들어갔고요.”

소박한 꿈으로 시작된 그의 꿈은 한국의 대표기업 대표 CEO로 이어진다. 정보통신총괄 대표이사 부사장(2000년)을 거쳐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삼성전자 기술총괄 부회장,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 부회장(2008년~2009년)을 역임했다. 정보통신 분야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전기전자기술자협회(IEEE) 산업리더상’까지 수상했다.

그가 젊음을 다 바쳐 36년간 일해 온 삼성은 그에게 어떤 조직일까.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회사 다니기가 진짜 편한 조직이 삼성입니다. 도덕성, 에티켓 등 몇 가지만 지키면 삼성처럼 편한 조직이 없어요. 자율성 있는 조직입니다. 그게 삼성의 장점이고 특징이예요.” 지금 삼성 임직원들도 그리 생각하는지 갑자기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

▶“문제가 크게 있을 때 더 많은 기회가 있다.”

이 전 부회장은 오랜 삼성 직장생활에 대해 “비교적 순탄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취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리 평탄하지 만은 않았던 것 같다. 삼성전자에 입사해 주로 음향기 관련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비디오 생산부장을 거쳐 1994년 무선사업부문 이사로 발령을 받는다. 당시 사람들은 “이기태가 물 먹었다”고 수군거렸다. 당시만 해도 무선통신은 장래성이 없는 홀대받은 부서였다.

‘삼성이 휴대폰을 만든다’는 것 자체에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또 다른 기회이기도 했다. 애니콜 신화는 그런 다짐에서부터 탄생했다. 해외제품을 사다가 수없이 뜯고 조립해 가며, 더 튼튼하고 가벼운 제품을 만들기 위해 매일 밤샘 연구에 매달렸다. 특유의 저돌적인 스타일로 스스로 사업을 꾸리고 확장해 나갔다.

‘깜빡이 없는 불도저’이라는 애칭도 그때 붙여졌다. “문제가 있을 때 더 많은 기회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부딪힘도 있었지만, 오히려 저한테는 기회가 됐습니다.” 부족한 게 많았기에 무한한 상상을 맘대로 할 수 있었고, 길이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길이 보였다는 그의 말에 뭔가 묵직한 감동이 전해왔다.

힘들게 만든 물건을 팔고, 정작 돈을 못 받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안 파는 것도 마케팅’라는 그의 유명한 말도 여기서 나왔다. “룰도 못 지키는 사람들과는 무슨 거래를 합니까. 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제품을 팔지 말라고 했습니다.”

‘안 파는 것도 마케팅’이라는 그만의 사업원칙은 거대 사업자들의 가격 공세 속에서도 꿋꿋이 프리미엄 전략을 고수하며 오늘날의 삼성 휴대폰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실패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이건희 회장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실패론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이 전 부회장 자신도 이건희 회장 주도로 휴대폰 등 무선제품 화형식을 겪었으니 남다른 느낌과 주장이 있을 것 같았다. “실패할 걸 뻔히 알면서도 해보라고 한 적도 있다”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는 실패라도 ‘이유있는 실패’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려면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매번 실패만 하면 그건 무덤이지요. 실패를 성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실패도 용인될 수 있는 겁니다.”

그는 같이 일할 사람을 볼 때 도전정신, 즉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장 중시했다고 말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성실성과 도전정신이 있으면 갈고 닦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삼성 휴대폰의 성공신화도 도전과 성취욕에서 나왔다. “도전을 통해 성취욕이 생기면 사기가 진작되고, 미래가 보입니다. 근면성도 생깁니다. 그래야 큰 성공이 이뤄집니다.”

옆에서 본 이건희 회장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창조경영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타고난 소질도 있어야 해요. 감성으로 배워지는 것도 아니고요. 응용력과 실천력이 생기려면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건희 회장은 선각자적인 사람이죠.


▶스마트폰 그리고 잡스와의 만남

그는 정보통신 총괄사장 시절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를 2번 만났다고 했다. 특유의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예의바른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도 얘기했다. 당시 잡스와 IT 대세론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었는데,이 부회장은 “모바일”, 잡스는 “PC”를 꼽았다.

이런 믿음에서 이 전 부회장은 삼성 모바일에 TV와 MP3, 카메라를 넣었다. 모두 세계 처음이었다. 이후 PC가 대세라던 잡스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아이폰을 내놓고, 세상을 흔들어 놓는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스마트폰 시장이 이처럼 급성장할 줄 알았냐는 질문에 그는 “알았다”고 단호히 말했다. 세간에는 삼성의 스마트폰 진입이 무척 늦은 걸로만 알고 있지만, 알고 보면 삼성 역시 스마트폰에 대한 준비를 일찌감치 해왔다. 그랬기에 애플을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2002년부터 스마트폰에 대한 투자와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시장 규모는 1~2%수준 밖에 안됐지만, 앞으로 스마트폰 시장에 크게 커질 것으로 보고 꾸준히 투자를 했지요.” 덕분에 아이폰보다 앞서, 스마트폰의 원조격인 ‘미츠(MITs)’를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삼성은 자체 운영체제(OS)가 없었다. 소프트웨어 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구글 창업자와도 수차례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그가 기술총괄 부회장으로 옮기면서 백지화됐고, 구글의 첫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파트너는 HTC로 넘어갔다. 최근 삼성전자와 애플 간 특허전쟁에 관해서도 “애플에게 왜 특허문제를 걸렸는지 잘 분석해 대응해야 할 것”이라며 적지않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정치는 “NO.” 버릴수 없는 ‘경영 DNA’

그가 최근 세간의 주목을 다시 받는 일이 있었다. 코스닥 상장사인 KJ프리텍 최대 주주가 되었을 때였다. ‘이기태 효과’로 KJ프리텍은 상한가로 치솟기도 했다. 그는 “회사를 인수해 경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사가 어렵고 CEO가 지인이라 경영에 도움을 주기 위해 투자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특유의 ‘경영 DNA’는 버릴수 없었다. 적자에 허덕이는 회사를 지난해 8월을 기점으로 흑자로 돌려놨다.

“직접 경영에는 참여 안 하고 틈틈이 자문역할만 합니다. 공장을 둘러보고 개선항목을 200~300가지 만들어 절차대로 하니 8월부터 흑자가 나더라구요. 향후 신규 사업도 붙여볼 생각입니다.”

중소기업이다 보니 직원들이 제대로 교육받은 것도 없고, 생산성ㆍ품질관리, 마케팅이나 기술개발의 정통성도 없는데,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지도하고 육성해 가면서 미래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 CEO출신답게 일자리 창출에도 관심이 많았다. “IT가 발달하면 할수록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 자체를 다시 읽어봐야 할 겁니다. 사회에 대한 환원, 기부, 경제에 대한 원론이 다시 바뀌어야 합니다. 경제에 대한 연구를 또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시점이 됐습니다.”

정치를 할 생각은 없느냐는 물음에 단호히 “NO.”라고 말한다. “재미가 없다”는 게 그의 답이다.

▶“집사람이 나보다 더 대인배.”

그는 연예 결혼을 통해 아내를 만났다. 아내 얘기가 나오자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당당함이 무색할 정도로 쑥스러워하며 “집사람은 나보다 더 대인배입니다. 마음이 크고 베품도 커요”라고 말했다.

자녀들의 장래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거죠. 삶도 다른데. 방임해서 키웠습니다.”

자녀의 결혼를 반대한 적도 없다. 본인이 좋아한다면 말리지 않았다.

그는 요즘 손자 보는 낙에 푹 빠져 산다. 그런데 느닷없이 매일 하루 한 시간씩 영어공부를 한다고 말했다. 영어 잘하는 손자와 대화하기 위해서란다. “자막없이 영화 보는 게 목표인데, 쉽지는 않네요(웃음)” 또 다른 인생을 준비해 가는 그에게서 넉넉함이 전해 왔다.

정리=박영훈ㆍ문영규 기자/par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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