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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을 여는 사람들> "서민들의 발 역할…그들을 보면 힘이 절로 나요"
김세영씨 (버스 운전기사·56 · 남)
새벽 4시2분 전, 동이 트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 매서운 한겨울 칼바람에 꽁꽁 언 두 손을 그러쥐고 버스정류장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새벽 4시 정각이 되자 이들의 새벽을 열어줄 사람이 도로 저편에서 힘찬 엔진소리와 함께 다가온다. 바로 새벽 첫 버스 운전기사 김세영(56) 씨.

손님 한 명 한 명 탈 때마다 정중히 인사하는 김 씨의 얼굴엔 편안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그는 대중교통 운수경력 30여년의 노련하지만 겸손한 프로다. 스스로를 베테랑으로 여기냐는 질문에 김 씨는 손사래를 쳤다. 다만 자신이 공공의 편의와 안전을 책임진 버스기사라는 점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며 수줍게 웃었다.

승객의 대부분은 복정, 강남, 노량진 등지에 밀집해 있는 인력회사에 당일 차출되어 출근하는 일꾼들. 이들은 버스에 승차하기가 무섭게 눈을 감고 촌각이나마 잠을 청한다. 그들을 보는 김 씨는 왠지 모를 사명감끼지 든다. 언제부터 그는 이들의 새벽을 여는 기사가 된 것일까.

김 씨에게 버스 운전은 소중한 가족과 인생의 보람을 가져다준 고마운 축복이다. 충북 제천의 자그마한 시골마을에서 그는 8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10대에 아버지를 여의자 18세부터 화물차 운전수의 조수로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존경하던 아버지의 부음과 함께 떠넘겨진 빚, 그리고 아직 어린 동생들이 그를 남들보다 조숙하게 만들었다.

“10년을 시내버스 운전을 해서 그 빚을 다 갚았어요. 그리고 20대 중반쯤 해서 화물차 운전수가 됐죠. 그때는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운전을 하다가 만났다는 김 씨. 충북에서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우연히 월악산에 놀러온 그녀를 손님으로 태웠다가 고운 인품에 반해 이름 석 자를 기억해두었다고 한다. 전화라고는 이장댁마다 수동전화가 한 대씩 있던 그 시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장에게 그녀의 이름을 말하고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인연이 닿아 백년가약을 맺은 김 씨 부부는 아들 딸을 하나씩 낳아 알콩달콩 행복한 삶을 꾸리고 있다. 

새벽에 일하는 사람들은 몸이 천근만근 무겁지만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 그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의 희망이 있다. 그 새벽을 헤럴드경제가 쫓아가봤다. 사진은 새벽 버스 운행에 나선 김세영 기사의 모습.


27세 아들은 사회인이 된 지 오래지만, 이제 겨우 고1인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아버지로서 힘내야 한다고 다짐하는 김 씨.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여행은 거의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버스 운전은 김 씨 인생의 중요한 기점이자 추억의 보고다.

“서른이 다 돼 상경해서 서울에서 처음 버스를 모는데, 기분이 좋고 가슴이 뛰었어요. 그때는 문도 미닫이 자동식이 아니라 접이식이었어요. 그리고 안내양이 있어서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안내하고 그랬는데, 88년도 올림픽 이전에 다 없어졌죠. 토큰 쓰던 시절 생각을 가끔 하고 그럽니다.”

버스기사로서의 고충도 있었다. 무임승차 취객이 무례한 말을 해도 혹여나 회사 이름에 누가 될까 그저 참는다고. 술값 몇만원은 내도 버스비 1000원을 아끼는 고객을 만나면 섭섭할 때도 있다고 한다.

기사로서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은 역시 안전운전이다. 하루하루 무사히 운전을 마친 후의 귀가길, 그리고 땀 흘리고 일한 뒤 어김없이 찾아오는 월급날 역시 그의 행복한 일상의 일부다.

“회사와 고객, 기사 이렇게 삼위일체, 다같이 상부상조하고 그런 게 좋죠. 그저 하루하루 무사운전하고 돌아갈 때 좋고요. 그러다 월급날 되면 기분이 아주 좋고 그럽니다.”

은퇴 시까지의 목표가 있냐는 물음에 김 씨는 다시 잔잔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젓는다. “특별한 목표나 욕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건강하고, 직장에 충실하고, 소신껏 살다가 그렇게 인생 마감하고 그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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