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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五感 ‘상실의 시대’ 그래도 사랑은…
정체불명 전염병으로 감각이 사라진 세상 ‘퍼펙트 센스’…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두 남녀, 그들의 로맨스 가능할까
어느 날 사람들이 냄새를 잃었다. 그 다음엔 맛을 느낄 수 없게 됐다. 세상은 혼돈에 빠진다. 상대가 없는 분노와 적의로 사람들은 미쳐 날뛴다. 스테이크 대신 날고기를 먹어치우고, 술 대신에 알코올을 들이킨다. 서로 물고 뜯고 닥치는 대로 부수고 깬다. 하지만 오늘의 태양이 마지막이 아니다. 내일 아침은 또 온다.

“이제 두 가지 움직임이 있다. 뭐든 집어 들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 농부들은 젖을 짜러가고 군인들은 근무지로 향한다. 어떻게든 삶이 계속될 거라고 믿는 사람들.”

그렇게 삶은 지속된다. 폐쇄됐던 식당은 다시 문을 연다. 사람들은 이제 달콤함 대신에 바삭거림을 즐긴다. 고소함 대신에 부드러움을 느낀다. 맵고 짜고 시고 쓴맛은 없지만 차갑고 뜨겁고 쫄깃하고 딱딱한 느낌이 있다. 사람들은 다시 예쁜 접시에 음식을 담고, 와인잔을 기울인다.

영국 영화 ‘퍼펙트 센스’(감독 데이빗 맥킨지)는 ‘인간이 감각을 잃어버린 시대’라는 독특한 설정의 드라마다. 그때도 사랑과 우애, 아니 삶이 가능하기나 할까. ‘퍼펙트 센스’는 이색적인 로맨스물이자 인간 탐욕이 불러온 묵시록적인 세상을 그린 작품이고,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감성어린 영화다.

“어둠과 빛이 있다, 남자와 여자가 있다, 음식이 있고, 레스토랑이 있다, 질병, 직업, 교통…. 익숙한 일상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세상”

우아하고 감상적인 현악이 흐르는 가운데 한 여성의 차분한 내레이션,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한 남자가 한 여자와 만난다. 요리사 마이클(이안 맥그리거)과 수잔(에바 그린)이다. 담배와 담뱃불을 빌리는 아주 전형적인 ‘수작’으로 두 남녀의 관계가 시작됐다. 마이클은 “한 침대에서 다른 사람과 몸을 뉘지 못하는” 성격이고, 수잔은 과거의 아픈 상처로 더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여자다. 냉소적인 두 남녀가 만났으나 이제껏 한번도 느낄 수 없었던 호감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연구소에서 전염병 전문가로 일하는 수잔에게 영국 전역에서 발생한 이상현상이 보고된다. 슬픔에 빠졌던 사람들이 더이상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된 것. 정체모를 병은 확산되고 깊어진다. 처음엔 후각이었으나 다음엔 미각이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난폭해지고 세상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그러기를 며칠, 다시 세상은 예전과 같아지고 사람들은 상실된 감각에 익숙해져 간다. 감각을 잃어갈수록 두 남녀, 수잔과 마이클의 관계도 위기를 맞게 된다.

과연 삶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까. 내가 보고 있는 당신이라는 사람은 지나간 시간의 집적이고, 삶은 기억의 총체라고 할때, 기억은 맛, 냄새, 소리, 모양, 색깔, 촉각이 아닐까. 그렇다면 감각이 상실된 시대, 삶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나 있을까. 영화는 감각상실증의 원인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환경보호단체들은 오염과 유전자 변형식물과 호르몬으로 인해 야기된 생태계 종말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정보국은 자유세계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한다. (종교)근본주의자들은 세상의 불신자들에 대한 신의 형벌이라고 한다. 다른 이들은 붕괴된 자본주의 체제가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바이러스를 퍼뜨렸다고 한다”며 현대 사회를 은유하기도 하지만 결국 삶을 계속하는 일상의 경이로운 힘과 묵시록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인간들의 본능, 관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으로 맺는다.

감각상실을 소재로 한 영화지만 역설적으로 오감이 즐거운 작품이다. 특히 후각이 마비된 이들을 앞에 놓고 거리의 음악사가 바이올린으로 냄새를 표현하는 장면이나 영화 후반부 들리지 않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대목은 여운이 길다. 이안 맥그리거와 에바 그린의 연기도 일품. 2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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