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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치지 않는 수애의 내레이션…‘천일의 약속’의 힘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행복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몰려와/ 날개를 거두고/ 꽃피는 나의 가슴에 걸려온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중)”

조각나는 기억을 맞추기 위해 그녀는 중얼거린다. 지나간 옛 시인의 연보를 읊고 그 시인의 시를 노래한다. 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 시를 말한다.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정통멜로는 본격 궤도에 올랐으나 그 호흡이 빠르지는 않다. 갈등의 골이 서서히 깊어지는 만큼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서연(수애)의 증세도 천천히 드러난다. 그만큼 안간힘이다.


드라마 ‘천일의 약속(극본 김수현, 연출 정을영ㆍSBS)’이 10회 방송분을 맞으며 오롯이 수애에게로 집중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는 나이 서른에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자의 삶은 비애로 가득 찼다.

여섯 살에 부모를 잃고 홀로 서야했다. 가난에 맞서고 시련에 견뎌야만 했던 삶 안에서 겨우 특별한 인연을 만났으나 그에겐 이미 정해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시작은 끝이 정해진 사랑, 그리고 이별, 남겨진 것은 자존심 하나 때문에 삼켰던 눈물과 모든 것을 잊어야만 하는 병. 잊혀져야 하는 사람의 잃어가는 기억들뿐이다.

이것은 단지 사랑이야기만이 아니다. 전부를 잊어야만 하는 여자의 삶의 이야기다. 드라마의 속도는 느리다. 모든 것을 잃어야만 하는 여자의 삶을 비행기에 태워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깊고 고요한 드라마는 오롯이 ‘대사의 힘’을 빌려 스토리를 끌어간다.

지치지 않고 쏟아내는 김수현의 대사는 연기자들, 특히 주인공 수애의 나지막한 음성에 실려 드라마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물론 김수현식 장황한 대사는 그의 드라마에 익숙치 않은 시청자들에게는 ‘비호감의 영역’으로까지 인식되지만 반대로 그것은 김수현 드라마의 ‘탁월한 맛’이기도 하다. 특히 ‘불꽃’, ‘내 남자의 여자’ 등으로 이어지는 정통멜로극에서는 숨 고른 뒤 내쉬는 인물들의 나지막한 읊조림은 시청자와 네티즌 사이에 깊이 남아 온라인 공간을 떠돈다.

▶ ‘구구절절’ 수애의 명대사 =1회로 거슬러 가보니 수애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얼마면 우리의 이 날들이 추억으로 편입이 될까? 3년? 5년? /글쎄, 경험이 없어서/ 그리움이 없는 추억이 있을 수 있나? /그리움이 없으면 그건 추억이 아니라 그냥 기억이라는 거 아닐까?”

드라마는 거기에서 시작했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 이별을 맞아야 하는 자리에서다. 잊혀져야 하는 여자는 추억이 아닌 기억마저 도려내야 하는 자리에서 서른의 생을 정리한다.

그녀는 작가를 꿈꾸지만 대필작가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쓴다. 아직 제대로 이룬 것 하나 없는 삶인데 그것마저 잃어야 하는 현실은 수애의 문어체 대사 안에 녹아나다 이렇게 폭발하고 만다.

“차라리 벼락을 때려. 차라리 심장을 터뜨리라고. 이 저주를 튕겨내 시궁창에 처박아 버릴 거야”라고 끌어올리다 결국 “엿 먹어라! 알츠하이머”라고 뱉어버린다.

독하고 강하다가도 이내 낮게 내뱉는다. 그리운 사람을 향해서다.

“5년 후쯤이면 당신은 아빠가 되어 있겠지. 10년 뒤에는 허물어지는 40대 아저씨가 되어있겠지. 그때쯤이면 오늘이 누렇게 희미해진 옛날 사진 같겠지. 내려놓는지도 모르게 어느 날부터 내려놓았던 걸 알게 되겠지. 그 후로도 겹겹이 날들이 쌓여가고 당신한테 나는 공룡시대 화석이 되겠지.”

차분하고 단정한 서연의 성격처럼 수애는 꼭 그같은 목소리로 서연을 말하고 서연이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잃어가는 것들을 놓지 않기 위해 끝없이 자기를 중얼거리고 끝말잇기를 하고 시를 읊으며 부여잡은 감정선을 놓치지 않는다.

다만, 지형(김래원)의 어머니(김해숙)를 만나고 돌아서는 길에 “그 사람을 제게 보내주십시오. 오랫동안은 아닙니다. 저에게 1년만 보내주십시오...하마터면 그럴 뻔 했다”고 나지막이 이야기할 뿐이었다.

장황하고 섬세한 내레이션의 힘이 돋보이는 드라마 ‘천일의 약속’은 시청자 사이에서는 다소 엇갈린 반응이다. 

김수현 식의 과장된 대사와 내레이션에 대한 격한 거부 반응이 한 쪽, 정적인 이 드라마의 비극을 깊은 우물에서 끌어올리는 듯한 그의 말맛이 고스란히 묻어난다는 반응이 또 다른 쪽. 때문에 후자의 경우 김수현 드라마를 향한 새로운 마니아들을 만들어내며 '수애앓이'에 빠져들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절반의 방송분이 전파를 탄 현재 ‘천일의 약속’은 꽤 괜찮은 성적표를 받아들고 있다. 17.2%(AGB닐슨미디어리서치)의 전국 시청률로 월화 안방의 최강자 자리를 지켜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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