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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한 권력의 ‘오래된 미래’, 교실
애니메이션으로 들춰낸 인간의 치부 ‘돼지의 왕’…일찍이 깨달은 정글의 법칙…비열함 만이 아이들을 지배하는데…
따스하고 부드러운 공기와 유쾌하고 우호적인 느낌, 매끈하고 유려한 움직임은 없다. 거친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애니메이션이다. ‘돼지의 왕’(감독 연상호)은 ‘애니메이션=가족영화’라는 공식 아닌 공식, 선입견 아닌 선입견을 단호하게 배반하는 작품이다. 관객에게 손을 내밀며 위로하는 정서란 아예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영화를 보고나면 치부를 들킨 듯 왠지 모를 씁쓸한 자괴감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고개를 끄덕이고 보다가 결국에는 뒤통수를 된통 맞는 느낌. ‘돼지의 왕’은 인간의 잔혹한 지배본능과 비열한 생존의지에 대한 한 편의 보고서 같은 애니메이션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 이후 한국 애니매이션의 소재와 외연을 넓힌 작품이라 할 만하다.

오늘도 사는 게 ‘굴욕’인 남자 종석이 있다. 소설가가 되지 못해 자서전 대필작가로 근근히 살아가는 그는 여전히 편집장의 모멸적인 비난과 조롱을 뒤로하고 원고를 챙겨 집으로 온다. 베베 꼬인 열등감과 세상을 향한 환멸감은 생계에 나선 아내에 대한 비아냥과 발길질로 풀어낼 뿐. 그러던 중 중학교 동창 경민으로부터 15년만의 전화를 받는다. 벤처회사의 CEO인 경민은 부도 후 홧김에 아내마저 죽이고 혼란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던 중 중학교 시절 절친했던 친구를 찾은 것. 둘은 술잔을 마주하고 옛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과거는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라 썩어버린 환부, 벽장 속의 죽은 고양이였다. 


중학교 시절 종석과 경민은 세상의 전부였던 교실에서 철저한 ‘약자’였고 ‘패배자’였다. 종석은 가난했고 아무 재능도 없는 아이였다. 경민은 ‘계집애’같이 소심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공부 잘하는 애, 힘이 센 애, 돈이 많은 애, 싸움 잘하는 애들이 맨 위인 먹이사슬과 권력의 서열에서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경민은 교실의 지배자들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실실 비굴한 웃음을 지어야 하는 존재였다. 종석은 경민의 유일한 친구였지만 무기력했다.

그러던 중 있는 듯 없는 듯 교실의 뒷자리를 묵묵히 지켰던 철이라는 아이가 반란을 일으킨다. 종석과 경민을 괴롭히던 패거리들을 단숨에 제압한 것이다. 종석과 경민은 철이를 따르면서 ‘그들만의 생존법칙’을 배워간다. 교실의 위계질서는 철이의 등장으로 인해 잠깐 와해되는 듯했지만 먹이사슬에서 한 단계 위에 있는 포식자(고학년)들이 개입함으로써 서열은 원상복귀된다. 불우한 환경에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철이는 종석, 경민과 함께 마지막 반란을 도모한다. 그러나 연극이자 장난에 불과했던 반란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끝난다. 철이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어른이 돼 다시 만난 종석과 경민은 비극의 현장이었던 교정으로 향하고, 15년 전 사건과 닮은 파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학원영화가 연상되지만 ‘돼지의 왕’은 한치의 타협이나 망설임없이 인간과 사회에 내재한 흉포하고 비열한 속성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잔혹극이라는 면에서 언뜻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 대왕’도 떠오르게 한다. 이 작품으로 장편 데뷔한 한국 애니메이션의 기대주 연상호 감독은 “돼지는 먹히기 위해 살아가고 개들은 사랑받기 위해 살아간다”며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에서 돼지와 같은 아이들의 분노와 슬픔을 리얼한 시선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삽화 같은 그림체는 때로 아이들의 얼굴이 개나 돼지로 변하는 판타지를 오가며 잔혹드라마의 거칠고 강렬한 결을 표현해냈다. 공교롭게도 양익준(성인 종석 역)과 오정세(성인 경민 역) 등 목소리 연기를 맡은 배우와 캐릭터가 닮은 점이 인상적이다. 여배우 김혜나와 김꽃비는 각각 어린 종석과 어린 경민의 목소리를 맡았다. 3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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