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또 다시 ‘실속없는 북한 대변인’ 역활만 한 채 평양 방문 일정을 마쳤다.
28일 엘더스그룹 및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 일행은 이날 오전 평양 순안 공항을 출발, 다음 방문지인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앞서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카터 일행이 만수대의사당에서 의례방문하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났다고 보도했다.김영남은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정상급 인물로, 김정일을 대신해 외교 행사에서 국가 수반의 역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김영남이 공식적으로 카터 일행을 영접했다는 것은 김정일과 직접 면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기도 하다.
평양에 간 카터가 김정일의 얼굴 조차 보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천안함 사태 직후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카터는 당초 예정됐던 일정을 하루 더 늘려가며 김정일과 면담을 희망했지만, 김정일은 결국 중국행 기차에 아무 말도 없이 올랐었다.
또 카터의 방북을 계기로 석방이 예상됐던 북한 억류 전용수씨 소재도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카터의 서울행 비행기에 그가 타고 있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는 분석이다.
북한의 이 같은 카터 홀대는 이미 평양 방문 전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이끌어내며 한 때 한반도 ‘평화 메신저’로 이름값을 올렸지만, 천안함ㆍ연평도 사태 이후 한국과 미국 정부에서 강경한 대북 정책이 주류를 이루면서 북한 역시 카터의 실질적인 영향력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한국과 미국 정부 역시 철저한 선긋기에 나섰다. 특히 미국의 경우 전직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카터가 평양 방문에 앞서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차량조차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카터의 이번 중국, 북한 방문이 지극히 개인적인 용무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 같은 한ㆍ미 그리고 북한의 카터 홀대는 그의 편향적인 한반도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평양에서 디 엘더스(The elders)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한국전쟁 이후 60년 이상 북한과 한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것은 비극”이라며 “미국은 한국의 보증인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큰 우려를 만들어내고 북한의 정치적 에너지와 자원들을 소진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김정일이 김일성의 정책을 이어갔으며 한국과도 정상회담을 했던 사실을 거론하면서, 햇볕정책이 남북간의 더 나은 관계를 구축하는데 매우 도움이 됐던 것으로 평가했다.
이 같은 카터의 주장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천안함, 연평도 사태, 3대 세습, 그리고 김정일의 불투명한 식량 분배, 핵 개발 시도 등 현 한반도 사태의 근본 원인은 보지 못한 채, 북한의 주장만을 되풀이 하고 있다”며 카터 역활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강조했다. 북한을 설득하지 못한 채 그들의 주장에 일방적으로 동조하는 태도는 한미 양국 정부에게 외면받을 수 밖에 없고, 결국 스스로의 상징성과 영향력까지 낮추게 된 것이다.
한편 카터 전 대통령 일행은 이날 오후 서울에 도착,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등 정부 관계자들과 만난 뒤 별도의 기자회견을 갖는다. 정부 관계자는 “카터 전 대통령의 의견이 아닌, 그가 전하는 북한 당국의 반응이 주된 관심사”라며 “그러나 북한이 카터를 통해 남북대화를 제안해올지는 미지수”라고 전했다.
<최정호 기자@blankpress>choijh@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