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러와’ 세시봉편은 예능에서 뒷방 취급을 받던 중년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는 됐다. 이들 중년 문화가 젊은 세대에 어필한 것은 아날로그 감성에 기반한 스토리텔링이었다.
지난 설날 연휴 방송된 ‘세시봉’ 콘서트의 공개방송은 무려 7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긴 시간 방청석 의자에 앉아있었더니 허리가 아플 정도였지만 엄마와 아빠를 따라온 10~20대들도 재미있게 방청하고 있었다.
“개그맨도 아닌데 아저씨들의 말이 더 웃긴다. 토크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오랜 기간 쌓아온 스토리가 와닿는다. 아저씨들의 화음도 특이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활동했던 세시봉 친구들에 관심을 보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중년들의 스토리는 젊은이의 스토리보다 우여곡절이 더 많다. 중년들의 이야기가 더욱 드라마틱하다. 20살 아이돌 멤버가 토크쇼에서 사적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때로는 각색해서 늘려나가는)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젊은 스타나 아이돌 가수들을 출연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대화가 나온다. 그런데도 중년들은 낡아보인다며 출연시키지 않았다. 토크쇼는 인생을 듣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는 외면당했다.
하기야 영상 혁명의 시대에 중년들이 늙수그레하고 칙칙한 느낌이 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건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중년도 잘 활용하면 의외로 인생의 힘이 느껴지고 현실감과 무게감도 있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중년들이 혼자 나오는 것보다 무리를 지어 나오면 스토리의 힘은 배가된다. 50대 아저씨 심형래 김학래 엄용수 셋이 출연했던 ‘라디오스타’에서 엄용수는 “하루도 안 싸운 적이 없다. 그렇다고 헤어진 적도 없다”고 말했을 때 느낌은 아이돌의 말과는 다르게 와닿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젊은 세대에게도 흥미롭다.
세시봉 친구들 사이에서는 54년생인 김중만이 막내지만, 노래할 때는 48년생인 64세 김세환이 막내다. 이들은 여전히 철 들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각자 서로의 개성만은 인정한다. 40년 우정을 지켜온 형, 동생이지만 권위적인 냄새는 나지 않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개성을 보장받는다.
자세히 보면 그들 관계가 매우 수평적임을 알 수 있다. ‘까도남’ 윤형주는 ‘럭비공’ 조영남 선배에게 수시로 들이대는 조영남 천적이다. 이런 점은 오랜 우정을 쌓아가기 힘든 젊은 세대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편견 때문에 기인처럼 보이는 송창식 등 세시봉 멤버들 각자가 ‘스토리’를 가졌다는 점도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매력을 느끼게 한다. 세스봉 친구들은 음악과 토크의 기막힌 조화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들이 활동하던 시절은 ‘왜 창에 불이 꺼졌냐’며 ‘불 꺼진 창’을 못 부르게 하던, 말도 안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독재 정권의 억압과 광기에서도 낭만적이고, 정신적인 여유를 잊지 않았다.
세시봉 친구들의 음악은 고(故) 김광석 다시 부르기 열기와도 이어지는 현상이다.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 등 고백조의 김광석의 노래는 진솔한 가사가 가진 진정성의 힘 외에도 감성이 부족한 전자음 일색의 아이돌 노래에서는 느낄 수 없는 담담하고 애잔한 아날로그형 감성을 선사한다. 얼마전 김광석 다시 부르기 콘서트 현장을 취재했던 나는 이 열기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공연장에는 부자, 모자, 모녀끼리 온 관람객이 유독 많았다.
그러니까 디지털의 자극적이고 현란한 전자음악에 물든 대중에게 소박한 어쿠스틱의 아날로그 감성을 전해주며 잔잔한 감동을 준 것이다.
음악의 아날로그 감성에서 중요한 것은 노랫말을 음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삐리빠빠’를 부르며 외계어 같은 단어를 나열하는 노래들과는 다르다. 김태원은 ‘부활’ 보컬에게 “노랫말을 생각하면서 불러라”고 조언한다. 가사 내용과 관계 없이 ‘오버’하지 말라는 뜻이다. 가수가 노랫말에 맞은 감성을 표현해야 그 감성이 청자에게 솔직하게 전달된다.
이런 아날로그 감성은 성시경, 박혜경 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성시경은 아날로그 감성을 간직한 몇 안되는 현역 가수이면서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 발라드 가수라는 점, 자극성 없는 심플하고 깔끔한 그의 목소리가 솔직함과 담백함을 드러낸다는 점 등이 어필할 수 있는 이유다.
젊은 사람들에게 부족한 감성과 경험을 채워주는 길은 테크닉과 기능, ‘스펙’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소양이라는 것도 아날로그 정서와 관계가 있는 말이다. 아날로그 정서란 EBS TV의 ‘한국기행’에서 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다리가 있는 시골길을 걷고 있는 모습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날로그 감성은 중년과 신세대를 서로 연결하고 소통시킬 수 있는 큰 힘이요 무기다.
서병기 대중문화전문기자/wp@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