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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파멸의 시작 (36)
글 채희문/그림 유현숙

혹시 ‘하염없다’라는 단어의 뜻을 아시는지? 사전을 찾아보면 ‘끝맺는 데가 없다’ 라든지 ‘그침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되지만, ‘시름에 싸여 이렇다고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멍하다’는 숨은 뜻도 지니고 있는 말이다. 시베리아 같은 곳에서는 간혹 하염없이 눈이 내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하염없는 그동안 사람들은 집에 틀어박힌 채 진정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외롭군, 외로워”

유민 회장은 어둡고 추운 대형 김치냉장고 안에서 하염없는 외로움에 젖어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벌거벗은 채 두려움과 추위에 떨고 있는 철학자로 변신한 셈이었다. 통치자인 대왕에게 해를 가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디오게네스 이후 과연 진정한 외로움에 대해 고찰한 철학자가 누구였을까?

“글쎄 저 구두는 분명히 우리 남편 구두라니까요? 내가 같이 수 십 년을 산 남편의 구두도 못 알아볼 줄 아세요? 좋게 말할 때 내 남편 내놓으세요.”

아내 신희영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고무 테두리로 마감을 한 김치냉장고의 뚜껑 틈새로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 이렇게 죽는 것이로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술에서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헛구역질이 나기도 했으며 심한 갈증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오들오들 떨려오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게다가 점점 산소마저 희박해지는 것이 아닌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떠오르는군.’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면 철학과 역사학에 회귀하는 것일까? 유민 회장의 머릿속에는 느닷없는 디오게네스, 혹은 사도세자의 생각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회피본능인지도 몰랐다. 막상 이 꼴을 아내에게 들키게 되면 그 순간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공포… 그 공포를 피하기 위해서 중ㆍ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복잡한 기억을 떠올리도록 하는 것이 뇌의 본능 아닐까?

“사모님, 그만 돌아가세요. 네?”

마담은 언제부터인가 사정을 하는 투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희영의 목소리엔 더욱 가시가 돋아나고 있었다.

“글쎄 당신과는 말 한 마디도 섞기 싫어요. 그러니 내 남편이나 내놓으시라고요. 이봐요, 한 군. 어서 욕실이나 화장실 좀 뒤져봐요.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야. 옷장이나 냉장고 속도 열어보세요.”

냉장고 속도 열어보라는 신희영의 목소리는 송곳처럼 유민 회장의 귓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한 군이라고? 그렇다면 딸의 가정교사인 한승우를 대동한 것임에 분명했다. 세상에, 한승우에게까지 이 처절한 꼴을 들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유민 회장은 김치냉장고의 뚜껑이 절대 열리지 않도록 안에서 잡아당길 요량이었다. 그러나 내부는 매끈하게 마감되어 있어서 손가락 하나라도 걸어 잡아당길만한 고리도 없었다.

“사모님, 찾았습니다.”

잠시 김치냉장고의 뚜껑이 들썩이는가 싶더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한승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녀석, 같은 남자끼리 모르는 척 해줄 수도 있으련만…

“한 군, 나도 찾았어요. 이 여자, 송유나가 분명해요.”

모르긴 해도 송유나는 아내 신희영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잡혀 나오는 모양이었다. 울음을 삼키며 잘못했다고 비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유민 회장은 결코 감았던 눈을 뜰 수 없었다. 시간으로 보아 송유나 역시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질퍽하게 놀아났던 여자, 아직 몸에 물기조차 마르지 않았을 그녀의 모습을 어찌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꼴좋다. 어서 기어 나와요. 이 영감아!”

눈앞이 환해지는 것으로 보아 아내가 김치냉장고의 뚜껑을 열어젖힌 모양이었다. 아! 세상이 처음 열리던 날, 세상이 이리도 눈부셨을까… 유민 회장은 손에 잡히는 김치포기로 사타구니만을 겨우 가린 채 김치냉장고에서 기어 나와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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