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TV, 공분을 말하다-1] 공허한 힐링 가고, 이제 ‘공분’을 말한다
[헤럴드경제=서병기 선임기자] 세상이란 살기 힘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처방책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힘든 사람에게 위로와 위안을 건네는 힐링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힐링캠프’라는 토크쇼는 아직 남아있다.

어느샌가 힐링의 허구성이 제기됐다. 88만원 세대, 아니 N포세대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식의 대안 제시는 공허해졌다. 병 주고 약 주는 격이었다. 대책 없는 위로와 무책임한 힐링을 질타했다.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되자 처방전도 달라졌다. 


하나는 먹방과 쿡방의 유행이다. 허무한 힐링 수사학을 듣느니 먹는 게 남는 것이다. 적어도 순간적인 만족거리는 되는 먹방, 쿡방에 눈을 돌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먹방, 쿡방은 현실의 도피처로도 기능하는 셈이다.

또 하나는 서민들이 가진 울분과 분노 자체를 동력으로 삼는 드라마와 영화의 범람이다. 이는 공분(公憤)의 형태로 점점 강력해지고 있다. 억울하게 딸을 잃은 한 형사의 눈물겨운 복수극인 2012년 드라마 ‘추적자’는 분노를 엔진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 분노는 개인적으로 당한데서 느껴지는 분노와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서 오는 공분, 이 두가지가 합쳐졌다. 

영화 ‘암살’과 ‘베테랑’이 둘 다 1000만 관객을 넘긴 이유도 대중의 마음 깊이 자리한 분노때문이다. ‘암살’에서는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잔재에 분노하고, ‘베테랑‘에서는 사람을 개 패듯이 패고 돈을 던져주는 비뚤어진 재벌에 분노한다. 사회적 정의를 밝히는 ‘그것이 알고 싶다’가 1000회를 넘긴 것도 사회적 공분을 일으킬만한 재료들이 많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의 애환을 그린 2014년 드라마 ‘미생’과 노동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2015년 드라마 ‘송곳’은 많이 다르다. ‘미생’은 부조리한 시스템을 다루지만 정면 돌파는 아니다. 장그래가 정규직이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오 과장은 장그래에게 “버텨라” 정도로 말한다. 결국 이들은 회사를 떠나 새 회사를 차린다. 하지만 ‘송곳’은 회사가 밀어내도 나가지 않고 시스템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그 시스템을 바꾸려고 한다. ‘미생’은 버티는 법을 말하지 않지만 ‘송곳’은 노무사 구고신(안내상)을 내세워 버티는 방법(행동지침)을 알려준다.


‘육룡이 나르샤’에서 9할의 세금을 거둬 백성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은 ‘갑질’이나 ‘금수저’ 문제를 연상시킨다. 이전 사극에서는 주로 역사적 인물이 민초들을 대변했다면, 여기서는 3명의 가공인물, 열혈백성 분이(신세경) 검객 땅새(변요한) 사랑의 무사 무휼(윤군상)을 내세워 민초의 목소리를 그대로 집어넣었다. 이들은 고려 백성의 분노를 대변해 강렬함을 더하면서오늘날 서민의 분노의 목소리를 대신한다. 분이는 아예 농사 지은 걸 세금으로 다 바쳐야 하는 가혹한 현실에 분노해 감영창고에다 불을 지른다.

문화평론가 정덕현은 “대중들이 이전에는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그런 존재였다면 지금은 스마트한 미디어 위에서 하나로 모여 힘을 만들어내고 있다”면서 “이들의 분노를 바탕으로 한 콘텐츠는 힘이 강하다”고 했다.


이런 콘텐츠들은 과거에는 얼버무리는 결론이 통했지만 이제는 대충 덮어버리는 걸 대중들이 용납하지 않는다. 일부 젊은 세대는 ‘헬조선’이니 ‘죽창’이니 하는 표현도 사용한다.“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라는 게 서민정서다. 각성한 대중이 느끼는 분노라는 결핍의 정서는 요즘 대중문화 콘텐츠의 큰 동력이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