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렬 신봉자들 음모론 끊임없이 확대재생산
단순명확·논리·합리성이 매력 요소
대부분 시국상황과 명쾌하게 맞아떨어져
“그릇된 답변서 올바른 질문 구해낸다면
음모론은 정당한 비판이론 될수 있어”
“1990년대에는 퍼스트레이디 힐러리 클린턴이 남편을 공격하는 ‘거대한 우익 음모’를 폭로하면서, 권력 최상층의 인식을 공개했다. 2001년 9ㆍ11 이후 음모른은 중요한 정치적 결정의 근거를 제공하는 일종의 정치이론이 되었다. 2008년 미국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로 나선 세라 페일린은 선언했다. ‘버락 오바마는 공산주의자와 급진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설교자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이에 호응하여 ‘그를 죽여라’ 또는 ‘그들을 죽여라’고 연호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도처에 음모론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히틀러의 죽음, 달착륙, 케네디의 암살, 9ㆍ11테러는 물론 에이즈의 창궐까지 주요 사건마다 음모론이 뒤따랐고, 지금도 열렬한 신봉자들이 끊임없이 음모론을 만들고 주장하고 있다. 국내라고 다르지 않다. KAL기 폭파 사건부터 천안함 침몰, 디도스 공격,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특정 세력에 음모에 결과임을 주장하는 무수한 ‘설’들이 제기돼왔다. 일각에선 “주요 기관에서 암약하는 종북세력”을 음모집단으로 몰아세우고, 또 다른 편에선 “국가기관의 조직적 개입”이라고 맞선다. 국가적 사건 뿐 아니라 연예인 스캔들이 특정 시점에 터지는 이유조차 요동치는 정국과 명쾌하게 꿰어진다.
왜 이 시대는 음모론이 만연하게 됐는가. 현대인은 왜 음모론에 빠져들게 됐는가. 여든 야든, 지배층이든 피지배층이든 왜 음모론을 설파하게 됐는가. 사회학자 전상진 교수(서강대 사회학과)의 ‘음모론의 시대’가 막스 베버에서 지그문트 바우만까지 다양한 사회학자의 ‘음모론에 관한 이론’을 살피며 던지고 답하는 질문이다.
저자의 성찰은 크게 두 가지 층위를 향한다. ‘사람들은 왜 음모론에 매혹되는가’와 ‘정치가들은 왜 음모론을 이용하는가’이다. 하나가 신념 혹은 문화로서의 음모론이라면 또 한편은 정치 전략 혹은 동원이데올로기로서의 음모론이다. 저자는 막스 베버의 이론에 근거해 음모론은 기대와 현실간의 간극으로부터 비롯된 불공정, 불만족, 부정의, 불평등으로부터 생긴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행동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고통을 유발하며, 고통은 설명되어야 한다. 기대와 현실, 행동과 결과의 불일치에서 오는 고통을 극단적인 논리성과 합리성으로 설명하려는 의미체계가 바로 음모론이다. 막스 베버의 용어를 빌자면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설명하는 ‘신정론’인데, 음모론은 모든 복잡한 현상의 탓을 단 하나의 원인으로 귀착시키는 세속적 신정론인 셈이다. 여기서 단 하나의 원인이 바로 음모집단이며 절대악이고 응징해야 할 죄인이다.
음모론은 단순하고 명확하며 극단적으로 논리ㆍ합리적이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음모론은 강자의 통치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약자의 무기도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다. 저자는 “음모론은 현대 정치의 중요한 전략이자 자원이 되었다. 지지자 동원에 효과적이고 정적 공격에 유용하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하는 데 쓸모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저자가 밝혀내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음모론의 정치적 쓸모다.
9ㆍ11 테러 후에도 어김없이 음모론이 뒤따랐고 서로 다른 시각이 충돌했다. 공식 견해는 탈레반과 빈 라덴의 음모를 사실 로 가정했고, 이에 맞서는 주장은 미국 정부와 파워엘리트들의 음모라고 추정했다. 두 가설은 모두‘ 음모론’의 형태를 띤다. |
보통 우리는 ‘음모론’이라고 하면 언뜻 일관되고 합리적인 논리체계를 갖춘 주장이지만 편집증적이고 종말론적 태도를 보이며 황당하며 망상에 가까운 헛된 짐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시각은 ‘질병 음모론’이다. 그러나 권력이나 주류에 의해 주장되거나 공인된 ‘설’ 역시 음모론인 경우가 적지 않다. 전쟁을 수행하며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한 미국이나 영국 정부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결국 이라크에는 화학무기공장이 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 때 음모론은 “단지 음모를 사실로 가정하는 이론“이다. 이는 ‘정상-음모론’이다. 그러나 ‘정상-음모론’은 음모론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장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저자는 권력 유지를 위해 활용되는 ‘정통음모론’과 ‘이단음모론’으로 구분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정통 음모론’은 흔히 지배와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권력자들의 정치전략이 되고, ‘이단 음모론’은 기득권자와 기존 체제를 바꾸려는 약자의 정치전략이 된다. 그래서 ‘정통 음모론’은 ‘통치 음모론’이며, ‘이단 음모론’은 ‘저항 음모론’이다. 그러나 저자는 “정통과 이단의 음모론은 모두 ‘예외적이고 특별한 희생자’를 특권화하고 ‘모든 비난받을 일’에 책임이 있는 ‘적’을 ‘비인간적이고 전능하며 악의 현신’으로 악마화한다”고 공통점을 지적한다. 때로는 정통 음모론과 이단 음모론이 결합되기도 한다. 모든 음모론이 지닌 위험성이다. 그 결과 정치권력은 책임으로부터 달아난다.
그렇다면 모든 음모론을 배척해야 할까. 저자는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기본적으로는 음모론이 올바른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왜 사회는 정의롭지 못할까? 왜 서민들은 고통을 겪을까? 왜 불평등은 커져 가는가? 왜 부당한 일들이 일어날까?
문제는 음모론이 흔히 올바른 질문에 그릇된 답변을 결합시킨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자본가 때문에, 빨갱이 때문에, 일본인 때문에, 한국인 때문에, 자본가 때문에, 유대인 때문에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릇된 답변으로부터 올바른 질문을 구해낸다면 음모론은 정당한 비판이론이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물론 이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기대와 현실 사이의 격차, 불평등 및 불공정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최소화하고, 사회 문제를 가감없이 논의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활성화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