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계 英작가 바티 커 첫 내한전…10월 5일까지 국제갤러리서
복종·헌신 뜻하는 빈디캔버스에 붙이고 또 붙이며
계급체계·성차별 문제 제기
사리로 여성의 부재 부각 등
집·여성 상징하는 오브제로
사회적 고정관념을 뒤집어
인도 여성들은 미간에 동그란 점을 붙인다. 빈디(bindi)다. ‘제3의 눈’으로 불리는 이 점은 인도 전통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을 상징한다. 한 남성에 대한 헌신과 복종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빈디를 끊임없이 배열해 불교의 만다라 같은 회화를 선보이는 작가가 있다. 인도계 영국 작가 바티 커(Bharti Kherㆍ44)다. 커는 빈디를 끝없이 이어 붙여가며 추상회화를 만들어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작가로 발돋움했다. 바티 커가 첫 한국전을 갖는다. 오는 10월 5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아노말리(Anomaliesㆍ기형)’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전시에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접하는 일상의 오브제를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전혀 다른 의미를 창조해낸 작업들이 망라됐다.
▶빈디의 끝없는 반복, 초월적 만다라의 세계로=바티 커는 빈디를 정교하게 붙여가며 추상적 화폭을 만든다. 이로써 작은 빈디는 고도로 함축적인 매체로 치환된다. 매우 신비롭고도 개념적인 가능성을 보여주며, 놀라운 레이어를 드러내는 것.
콩알만한 원, 또는 올챙이 형상의 빈디를 이어붙이며 대형 회화를 만드는 작업은 엄청난 공력을 요한다. 작가는 인도 여성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빈디를 손으로 붙이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인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신의 작업이 갖는 의미를 찾아간다고 했다. 작가는 종종 ‘손의 엇나감’도 추구한다. 빈디들의 중첩과 움직임을 통해 지도, 사람들, 또는 추상적 얼룩을 만들어내는 것.
인도의 전통의상 사리(saree)를 여성의 머리에서 엉덩이까지 관통하게 한 바티 커의 조각‘Cloud Walker’. 관능적이면서도 기이한 포즈의 여성은 성적 에너지를 뿜어내는 초월적 존재로, 신성과 괴물성, 인간성과 야수성을 겸비한 존재다. 왼손에 들고있는 농기구는 끝없는 노동을 상징한다. 186×115×93㎝ [사진제공=국제갤러리] |
영국 런던의 인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커는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인도를 여행하던 중 인도에 빨려들어갔다. 이후 인도 뉴델리에서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구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성장배경과 인도인이라는 정체성은 커로 하여금 인도 사회의 계급체제와 성 차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게 했다. 결국 작가는 가정, 집, 여성성을 즐겨 다루게 됐다.
이번 서울 전시에 출품된 빈디 시리즈는 이 같은 의도가 집약된 작품이다. 속박을 상징하는 빈디의 반복적 배열과 그것이 풍기는 종교적 초월성은 ‘결혼’이라는 현실과 ‘만다라’라는 초현실 세계를 동시에 품는 매개가 된다.
작가는 그러나 “반복적 배열은 일상에도 늘 존재한다. 내 작품을 초월적, 영적인 것으로만 해석하진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
▶인간은 불가새한 존재…의미의 이중성=바티 커는 조각작업에서 ‘의미의 이중성’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전통의상 사리를 든 여성이 춤을 추는 여신시리즈 ‘클라우드 워커’는 고개를 살짝 수그린 모습이 다소곳하다. 전통무용의 포즈인 듯하다.
실물 크기의 말에, 낡은 사당과 커다란 금속구(球)를 올린 바티 커의 ‘과거 현재 미래’,말은 과거, 사당은 현재이며 금속 구는 미래를 가리킨다. 무거운 구가 굴러내릴 듯 아슬아슬하다. 353×252×113㎝ |
그러나 한 걸음 다가가면 심상치 않다. 쩍 벌린 포즈 때문에 성기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사리는 여성의 뒤통수를 뚫고 들어가 엉덩이로 빠져나오고 있다. 인도여성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사리가, 타자에겐 아름다움의 상징일 수 있으나 여성 자신에겐 저주스런 굴레일 수도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 여성성의 불안정성과 불편함도 드러난다. 이 조각에는 신성하면서도 세속적이고, 우아하면서도 모호하고, 평온한 듯하면서도 폭력적인 양가적 측면이 모두 도사리고 있다. 이렇듯 초월적 존재를 주관적으로 재해석해 신성과 괴물성, 인간성과 야수성을 겸비한 존재로 해석한 커의 조합된 여성상은 성, 권력, 사랑, 신체, 기괴함에 대한 기존 관념들을 뒤흔들고 있다.
말(馬) 위에 작은 사원을 올리고, 사원 위에 무거운 쇳덩이를 올려놓은 ‘어제 오늘 내일’ 또한 의미심장한 조각이다. 말은 어제, 사원은 오늘, 그리고 금속 구(球)는 내일을 상징하는데, 구의 위치가 곧 굴러내릴 듯 한편에 치우쳐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버려진 낡은 문틀을 가져다 둥근 나무 기둥으로 받쳐놓은 작업이라든지, 커다란 나무에 밀랍으로 주조한 찌그러진 동물 머리를 열매처럼 매단 작업들도 인간이란 존재 자체와 인간이 만든 사회제도의 이중성에 의표를 찌른다. 조각 및 설치작품에서 바티 커의 의도는 이렇듯 더욱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02)735-8449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