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로부터 우승 축하 세례를 받으며 함박 웃음을 짓고 있는 서연정. [사진=KLPGA]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이강래 기자] 11년 전인 2012년 여고생이던 서연정은 KLPGA투어 한화금융 클래식에 아마추어 자격으로 출전했는데 2라운드에 홀인원을 잡아 화제가 됐다. 홀인원 부상이 당시 우승상금 3억원에 버금가는 2억 7천만원 상당의 벤틀리 승용차였기 때문. 골프대회 사상 가장 비싼 자동차의 주인공이 탄생했기에 서연정의 홀인원은 9시 뉴스에 보도되는 등 전국적인 화제가 됐다.
당시 경기위원장은 그러나 대회 팜플렛에 적혀있는 요강(‘아마추어는 부상을 받을 수 없다)을 이유로 서연정이 벤틀리를 받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골프 규칙을 관장하는 R&A와 USGA는 그 해 이미 ‘아마추어도 부상을 받을수 있다“고 규정을 바꾼 상태였다. 문제는 대회 팜플렛에 적힌 요강은 전년도 요강을 그대로 인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서연정에게 벤틀리를 수여해야 했으나 완고한 경기위원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를 인지한 타이틀 스폰서인 한화그룹 측에서 “서연정 선수가 아마추어 자격이어도 홀인원 상품은 상금과 다른 성격'이라며 자동차를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서연정은 "참가 목적이 아마추어 정신에 입각한 것이므로 상금이나 상품에 대한 생각이 없다"며 이를 고사했다. 하지만 주변에선 향후 KLPGA투어에 데뷔했을 때 ‘미운 털이 박힐까봐 두려워 사양했다'는 말이 돌았다.
서연정의 골프 인생은 ‘벤틀리 사건’ 이후 꼬인 듯 했다. 2013년 KLPGA투어에 입문한 후 준우승만 5차례 기록했을 뿐 10년 가까이 우승컵은 그의 차지가 되지 못했다. 2019년엔 ‘지옥의 레이스’로 불리는 시드전까지 가야 했다. 가장 뼈아픈 장면은 2015년 경기도 여주의 페럼클럽에서 열린 KLPGA선수권이었다. 당시 20세의 서연정은 안신애와 4차 연장까지 치른 명승부 끝에 아쉽게 무릎을 꿇었다.
‘골프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달고 다니던 서연정에게 골프의 신(神)은 마침내 손을 내밀었다. 서연정은 3일 경기도 용인의 써닝포인트 컨트리클럽(파72)에서 열린 KG 레이디스오픈(총상금 8억원)에서 최종 합계 14언더파 202타로 노승희와 동타를 이룬 뒤 연장전에서 파를 잡아 꿈에 그리던 우승컵에 입맞췄다. 이 대회는 서연정이 출전한 260번째 KLPGA 투어 경기였다. 무려 802라운드 만에 나온 첫 우승이었다. 이는 KLPA투어 사상 최다 출전 우승이다. 종전 기록은 237개 대회 만에 나온 안송이의 우승(2019년 11월 ADT캡스 챔피언십)이었다.
18번 홀(파5)에서 열린 연장승부는 서연정에게 유리하지는 않았다. 서연정의 티샷이 러프 지역으로 굴러들어간 것. 그러나 페어웨이로 볼을 보낸 노영희의 두 번째 샷이 우측으로 밀리면서 카트 도로를 맞고 법면에 멈춰선 것. 이를 지켜본 서연정은 침착하게 볼을 그린에 올렸고 5m 거리에서 2퍼트로 파를 잡았다. 세 번째 샷 마저 깊은 러프로 보낸 노현희는 네 번째 칩샷을 핀 2m 지점에 잘 올렸으나 파 퍼트를 넣지 못했다.
서연정은 우승 후 울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의 오랜 마음 고생을 알고 있었기에 펑펑 울 것이라 예상했다. 이에 대해 서연정은 "같은 후원사(요진건설) 선수인 (노)승희와 연장전을 치렀는데 우승하지 못하는 선수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덤덤했고 눈물이 들어갔다"며 “승희에게는 미안하다는 말 밖에 못 하겠다"고 했다.
딸과 함께 인고의 시간을 보낸 서연정의 부모는 식당 문까지 닫고 이날 경기장을 찾아 딸의 우승 장면을 지켜봤다. 서연정은 “우승자 인터뷰를 가장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부모님께 우승자 부모가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며 “마지막 홀에 가서야 부모님이 오신 걸 봤는데 우승의 기쁨을 같이 나눠서 정말 좋다”고 말했다. 서연정은 이어 “대상 시상식에 참석하는 다른 선수들을 보면서 많이 부러워했는데 이젠 나도 우승자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게 돼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며 “다이어트를 시작할 것”이란 말을 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의 페달을 밟기 시작한 서연정의 골프 인생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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