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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세 골프소설 18] 천일의 앤과 블러디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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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메리라 불린 메리 1세 여왕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영화 <천일의 앤>의 주인공 앤 볼린과 블러디 메리가 16세기 중반 잉글랜드역사에 등장한다. 글 이인세

결국 헨리 8세의 판단 미숙으로 처남 매형 지간인 잉글랜드의 헨리와 프랑스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내전으로 치닫는 운명에 놓이게 됐다. 캐서린은 프랑스로 진군한 헨리를 대신해 영국을 지켰다. 스코틀랜드가 3만의 대군을 잉글랜드 북단인 노덤버랜드에 있는 플로덴 지역의 대평원에 진군시켰고, 캐서린은 2만여 명의 잉글랜드군을 이끌었다.

하늘은 잉글랜드의 편이었다. 격전의 날에 플로덴 대평원은 안개가 덮였다. 스코틀랜드보다 안개와 비가 많은 날에 익숙했던 잉글랜드군은 승기를 잡았다. 이날의 전투로 스코틀랜드의 병사는 3분의 1인 1만 여명이 사망하고 진두 지휘를 했던 제임스 4세마저 전사했다. 잉글랜드 사람들은 스코틀랜드가 전쟁에서 패한 이유는 바로 골프 때문이었다고도 야유했다.

제임스 4세가 골프 금지령을 취소한 지 10년 간 다시 골프가 붐이 일었고 국민들이 훈련을 게을리하며 골프만 쳤다는 것이다. 궁술과 무기가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는 훈련을 등한시한 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는 것이었다.

플로덴 대평원에서 제임스 4세 왕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의 갑옷만이 창에 찔린 채 전쟁터에 버려져 있었다. 골프를 사랑해서 적국의 딸과 결혼했고 금지령을 풀었던 그는 골프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나 전투에서 아깝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엉뚱한 전투에 끼어든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정국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었다. 국민들은 그를 환영했고 왕권이 강화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그러나 정작 공헌을 한 왕비 캐서린은 댓가를 치러야 했다. 임신 중 벌어진 전투에서 쌓인 스트레스로 인해 사산을 하고 말았다.

1516년 캐서린은 다시 임신했지만 권좌를 이을 사내아이를 바랐던 헨리 8세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애석하게 여자아이를 출산했다. 핸리 8세의 첫번째 혈육이었다. 이 아이가 훗날 여왕이 되면서 영국의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블러디 메리로 불리는 메리였다.

유럽에 모처럼 평화가 왔다. 잉글랜드도 마찬가지였다. 헨리 8세의 여성 편력이 서서히 시작됐다. 왕실을 이을 태자가 없다는 이유로 헨리는 캐서린과 이혼을 고려했다. 헨리는 교회에 ‘애초 캐서린 왕비는 형님이었던 아서태자의 아내였었던 만큼 캐서린과 결혼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교회는 두 사람의 이혼을 허락해 주길 바란다’라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헨리의 이같은 서한에 로마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펄쩍 뛰었다. ‘캐서린은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받는 왕비이며 여성들의 교육에 열심이고 다방면에서도 다재다능한 영국의 자랑거리인 왕비여서 이혼은 어불성설’이라는 답변이었다. 교황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이모가 되기도 하는 캐서린의 이혼을 허락할 리 만무했다.

헨리 8세는 화가 났다. 이혼을 해야 현재의 정부인 앤 볼린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데 교황이 말을 안 듣기 때문이었다. 그는 로마교회인 카톨릭을 버리고 잉글랜드 만의 국교인 성공회를 만드는 종교개혁을 해버렸다. 법을 무시하면서 결혼을 위해 국교까지 바꾸게 된 것이었다. 성공회의 탄생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헨리의 두번째 아내는 캐서린의 시녀로 있던 앤 볼린이었다. 그다지 아름다운 모습도 아니었고 귀족 출신도 아닌 앤은 그러나 헨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데 성공하고 마침내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가 됐다. 앤은 1533년 아이를 낳았지만 역시 딸이었다. 첫 딸인 엘리자베스를 낳고 앤은 계속 임신을 했으나 유산을 거듭했다.

왕위 계승을 위한 왕자 생산이라는 명분으로 이혼을 했는데 두번째 왕비도 아들을 못낳았으니 헨리 8세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결국 앤마저도 헨리의 눈밖에 나면서 이혼을 요구당했으나 죽임을 뻔히 알고 있는 앤은 끝까지 버텼다. 결국 왕은 간통혐의를 뒤집어 씌웠고, 앤은 1536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헨리 8세는 모두 6명이나 되는 왕비를 차례로 맞이하면서 여성편력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훗날 정권을 잡은 첫번째 왕비인 캐서린의 딸 메리 1세는 아버지의 불륜, 어머니의 이혼 등으로 어두웠던 시절을 보낸 만큼 누구에겐가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던 터였다. 메리는 아버지 헨리 8세가 6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배다른 자매인 제인과 왕권 다툼에서 이기고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메리는 왕좌에 오르자마자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숙청을 단행했다. 메리의 권좌는 피의 보복으로 점철됐다. 너무도 심한 폭정은 정적들을 양산시키기에 충분했고 결국 메리 여왕은 축출됐으며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메리 여왕을 가리켜 ‘피의 메리’라고 불렀다.

잉글랜드 왕가의 혈통은 이제 그나마 두번째 부인이었던 앤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1세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는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됐고, 잉글랜드는 이때부터 훗날 대영제국이라 불리는 대제국 건설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훗날 태어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정치적 정적이 된다.

* 필자 이인세 씨는 미주 중앙일보 출신의 골프 역사학자로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우승을 현장 취재하는 등 오랜 세월 미국 골프 대회를 경험했으며 수많은 골프 기사를 썼고, 미국 앤틱골프협회 회원으로 남양주에 골프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저서로는 <그린에서 세계를 품다>, <골프 600년의 비밀>이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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