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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세 골프소설 17] 아라곤의 캐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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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캐서린 왕비.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16세기 중반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헨리 8세는 스페인 로슬린드 코세이 가문의 캐서린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녀는 ‘아라곤의 캐서린’으로 불렸다. 호걸로 알려졌던 헨리 8세는 당시 프랑스를 침공해서 그곳에서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혼이었던 캐서린 왕비가 손수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온 것이었다.

헨리 8세는 골프광은 아니었지만 프랑스 통치 동안 이따금씩 골프를 즐기며 소일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잉글랜드의 문헌에는 캐서린 왕비가 신하들에게 했던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헨리 왕께서 프랑스에서 골프(GOLFE, 당시의 기록에 쓰여진 골프의 철자)에만 전념해서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렇게 운동도 하면서 쉬셔야지. 골프를 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골프란 참 좋은 운동이다.’

영국에 남아있던 캐서린 왕비는 신하들에게는 시간이 남으면 골프를 치라고까지 장려했다. 여색을 좋아했던 헨리 8세가 다른 생각을 않고 골프를 친다는 데 왕비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캐서린 왕비가 골프를 쳤는지 기록은 없지만, 골프에 대한 발언은 역사상 여성이 골프에 대해 언급한 최초다. 골프의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캐서린은 문서에 기록된 최초의 여성 골퍼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보다 50년이나 앞 세대를 살다 간 여성이었다.

헨리 8세는 잉글랜드인에게 각인된 강한 군주 중 한 명이다. 16세기 초 잉글랜드와 스페인은 동맹 사이였다. 스페인의 헤르난데스 2세는 스페인 역사상 최초의 통일을 이룬 강한 왕이었다. 영국은 헨리 7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헤르난데스의 막내딸이었다. 잉글랜드 랭카스터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캐서린의 친할머니는 헨리 7세와는 팔촌 관계였다.

캐서린은 자그마한 키에 가냘프고 예뻤으며 지적인 이미지를 풍긴 것으로 기록된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고 피부는 투명했으며 우아한 기품을 지닌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왕실 가문에서 라틴 문학과 역사, 법학 등을 두루 섭렵했으며 신앙심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1501년 캐서린의 나이 15세 때 아버지 헤르난데스와 함께 두 사람은 남편감인 영국의 아더 튜터 세자를 만나기 위해 영국 방문길에 올랐다. 두 나라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동맹을 맺어 공동 대처하자고 협약을 했고, 무역관세 철폐조약도 맺었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15세 동갑내기 두 사람은 행복한 신혼을 보냈다.

행복도 잠시, 신혼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두 사람은 영국 고유의 땀병에 걸렸다. 캐서린은 다행히 회복했으나 남편 아서는 사망하고 말았다. 시아버지인 헨리 7세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며느리 캐서린을 무척 아꼈다. 겨우 16세밖에 되지 않은 아리따운 과부를 스페인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영국보다 앞선 스페인의 해상 무역도 전수받아야 했던 상황이었다.

헨리 7세는 죽은 큰 아들 아서보다 6살 적은 동생 헨리를 떠올렸다. 둘째 아들 헨리와 캐서린을 다시 결혼시킬 작정이었다. 문제는 교회였다. 로마 교회법에 의하면 이는 분명 근친혼이고 이를 묵과할 수 없다는 여론이 일었다. 헨리 7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의 어머니이며 스페인의 왕비 이사벨라로 하여금 교회에다 압력을 넣게 했다. 막내딸이 과부로 평생 늙어 지내는 것 보다는 재혼이 낳다는 생각에 이사벨라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훗날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 군림하는 헨리 8세인 시동생 헨리와 형수 캐서린은 그렇게 결혼했다. 1509년 헨리는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헨리 8세가 된다. 대관식은 그야말로 세기의 즉위식이었다. <유토피아>의 저자인 사상가 토머스 모어는 대관식을 ‘오늘은 우리들의 노예 생활이 끝나고 슬픔도 가시면서 기쁨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기술했다.

헨리 8세의 즉위는 수십 년 동안 계속됐던 왕권 다툼이 종식되고 이로 인해 발생한 모든 잉글랜드의 내전이 끝나는 날을 의미했다. 흰 드레스에 금발을 늘어뜨린 스페인의 캐서린은 최고의 여인이었다. 헨리 8세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왕이었다. 180센티미터의 키에 호남형이었으며 골격이 대단했다. 승마와 사냥은 기본이었으며 전쟁에 나가 진두 지휘를 하는 용맹한 사나이였다.

어릴 적에 수도사가 될 생각이었던 탓에 박식했으며 시와 소설에 능했다. 우렁찬 목소리에 말재주도 좋은 사교계의 최고 스타였다. 다만 급한 성격에 경제적인 안목은 없어서 국고를 많이 축냈으며 공사의 구분이 애매한 것으로 대중들에게 인식되어 있었다.

1513년 프랑스의 침공도 잘못된 판단에서 실행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당시 사회의 지배적인 여론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으로, 영국은 개입할 명분도 실리도 없었다. 단지 헨리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장인의 나라 스페인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출정한 단순히 왕의 개인적 취향이었다. 의회는 반대했고, 스코틀랜드도 반대했다. 스코틀랜드는 헨리 8세의 누이인 마가렛이 왕비로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와 스코틀랜드는 동맹지간이었다.

* 필자 이인세 씨는 미주 중앙일보 출신의 골프 역사학자로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우승을 현장 취재하는 등 오랜 세월 미국 골프 대회를 경험했으며 수많은 골프 기사를 썼고, 미국 앤틱골프협회 회원으로 남양주에 골프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저서로는 <그린에서 세계를 품다>, <골프 600년의 비밀>이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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