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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세 골프소설 11]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콜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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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아버캄프의 그림 속에 종종 나오는 콜벤 모습.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페어웨이를 지나 그린위의 토끼 굴에다 자갈을 집어넣는 경기 방식은 헨리와 목동들이 시초였죠.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골프의 시작과 발달은 당연히 스코틀랜드라고 봐야겠지요. 물론 네덜란드의 그것들이 시초라고 하는 다른 의견들도 존재하지만...”

바닷가를 거닐던 엔젤라의 시선이 동쪽 바다를 향했다. 엔젤라 관장은 스코틀랜드의 목동들과 세인트 앤드루스 마을 사람들에게 점수를 더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다. 엔젤라 관장은 골프의 기원에 관한 여러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기원에 대해 그는 말을 이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스티븐 반 헹겔(STEVEN J.H. HEIGEL)은 1972년에 출판한 저서 고대의 골프(EARLY GOLF)에서 네덜란드가 골프의 원조라고 기술했다. 1927년 12월 26일 네덜란드 북부 지방의 ‘레온 안 더 비치’라는 마을에 4홀짜리 골프 코스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었다. 그 코스의 길이는 4500야드로 홀당 무려 1천 야드가 넘는 골프 코스였다. 목표물은 비석이나 현관 등이었으며 코스를 적은 타수로 쳐서 목표물을 맞추는 팀이 승리하는 경기였다. 이 코스는 당시 네덜란드가 크로넨버그 성을 해방시킨 기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헹겔에 따르면 당시 놀이의 이름은 콜프(COLF)였는데 뜻은 클럽(CLUB)이었고 ‘스펠미텐골프(SPEL METTEN KOLVE)’라는 뜻의 네덜란드어로 ‘클럽으로 하는 경기(GAME WITH CLUB)’라고 불렸다. 이 게임은 18세기까지 홀란드에서 계속 이어져 왔으나 어느 때부터 이름이 ‘콜프(KOLF)’로 바뀌었고 공의 크기도 현재의 골프공보다 조금 컸던 초기에서 야구공만하게 커졌다. 코스의 길이도 수천 야드에서 갑작스럽게 너무도 짧은 25야드 정도로 줄어드는 경기로 변했다는 것이다.

헹겔은 스코틀랜드와 네덜란드 두나라 간의 골프에 대한 연결고리에 대해 두가지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첫번째가 당시 시대 상황과 지정학적 관계였다. 12~13세기 스코틀랜드보다 부국이었던 네덜란드에서 골프와 비슷한 놀이가 유행하면서 당시 무역선에 의해 자연스럽게 스코틀랜드로 전해졌다. 대신 스코틀랜드에서 만든 클럽을 네덜란드 상인들이 본국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는 전통적으로 재질이 좋은 나무들이 많이 산재했던 관계로 두 나라는 상호 교류를 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양쪽 나라에서 불려진 명칭에 대해 헹겔은 언어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최초에 당시의 이 놀이를 콜레(CHOLE)라고 불렀고 이어 ‘코스펠(KOFSPEL)’로도 불렸다. 그후 놀이의 형태가 변형된 뒤부터는 빙상에서 하는 것은 별도로 ‘콜벤(KOLVEN)’이라 불렀다고 한다.

실내에서 하는 놀이는 따라서 ‘콜프(KOLF)’라고 했다. 혹은 공을 때리는 형태를 가리켜 그 뜻대로 히트 콜벤이라고 불렀다. 차츰 세월이 가면서 명칭은 골프로 변천했다는 것이다. 반면 스코틀랜드 지방에서는 14~15세기 당시의 이 놀이를 ‘고우프트(GOUFT)’ 등으로 불렸고 남쪽의 잉글랜드는 고우프(GOWF), 혹은 고프(GOFF)로 다양하게 불렸다.

당시 이 놀이에 대해 양쪽 국가가 상호작용을 하지 않았다면 언어적으로 어떻게 이렇게까지 비슷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 헹겔의 주장이었다. 그는 두 나라가 북해를 사이에 둔 지리적 여건하에서 해상 항로를 선점했던 네덜란드가 무역이 훨씬 더 발달했기 때문에 골프는 자연스레 서쪽의 스코틀랜드로 건너갔다는 논리를 폈다.

헹겔의 가설은 당시 교류가 활발했던 항구들과 골프가 발달했던 지역들은 수도인 에딘버러를 비롯해 세인트 앤드루스, 던버, 노스베릭, 머슬버러, 리스, 뮤어필드 등 동해안에 몰려있다는 사실이 뒷바침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 입성한 무역상들은 한 두달 이상을 정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에딘버러 등 동해안 인근 지역에 머무는 동안 소일거리를 찾아야했고 자연스레 클럽과 공을 가져와 골프를 치면서 스코틀랜드 동해안에 전파가 됐다는 것이다.

이후 수백 년 동안 네덜란드의 해상 무역은 더욱 활발했는데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1660년에는 독일로, 1663년은 이태리 로마에까지 골프가 전파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헹겔은 그 증거로 1296년 로엔에 4홀짜리 골프장과 할렘이라는 지방의 교회 야드에서 혹은 넓은 도로에서 골프를 쳤다는 그림이 네덜란드에서 그려졌음을 제시하고 있다.

“한가지 연결고리가 부족한 것은 네덜란드의 그림으로 그려져 화폭에 담긴 증거들은 모두 16세기에 그려진 것이어서 논란의 여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거죠.”

헹겔의 주장에 대해 엔젤라 관장은 시대적으로 치명적인 오차가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에 반해 그는 “스코틀랜드의 골프는 최초의 문헌에 의한 증거로서 제임스 2세 왕의 칙령이 발표된 1457년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기에 네덜란드로서는 문헌적인 차원에서 약세를 보이는 것”이라고 반론했다. 비록 네덜란드에서 골프 비슷한 놀이가 먼저 존재했었고 무역선에 의해 스코틀랜드로 전파됐다 해도, 설득력을 잃는 것은 바로 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 때문이었다.

화폭에 담긴 헹겔의 그림. 제임스는 그 그림의 원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암스테르담. 제임스는 엔젤라의 말을 들으면서 7년 전인 2008년의 일을 떠올렸다. 업무차 독일 뮌헨에서 열린 겨울 스키 컨벤션에 참가했었다. 그곳에서 스키용품을 제작하는 오닐 본사와의 미팅을 위해 네덜란드로 향했었다. 작은 벤즈 승용차를 빌려 뮨헨을 출발했고, 슈트트가르트, 뒤셀돌프, 프랑크프루트 등을 거쳐 무려 12시간 만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업무를 마친 제임스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네덜란드를 방문한 그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비록 6백여년 전의 자취를 찾기는 힘들겠지만 작은 단서 하나쯤은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에서였다. 바로 수백 년 전 네덜란드 상인들이 무역선을 타고 스코틀랜드로 물건을 팔러 가면서 전파했다는 네덜란드 골프의 기원설에 대한 무엇이 없을까하는 기대였다.

암스테르담의 항구는 그다지 붐비거나 복잡한 곳은 아니었다. 항구 여기저기를 둘러보기도 하고 정박된 배를 개조한 식당에 올라서서 주변을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 흔적이라도 찾고자 했던 그에게 암스테르담 항구는 아무것도 보여주질 못했다. 적어도 골프에서만큼은 네덜란드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스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아무런 노력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임스는 속으로 ‘암스테르담 항구에서 목선으로 만든 무역선에 골프채와 볼을 실은 상인들이 서쪽 바다로 향했을 것’이라는 상상만 했다. 실망만 준 암스테르담의 항구와는 달리 제임스에게 네덜란드가 그나마 남겨준 선물은 라익스 국립미술관에서였다. 암스테르담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유서깊은 라익스박물관은 1995년 민영화된 곳으로 네덜란드가 배출한 렘브란트 등 세계적인 작품 수만 점이 전시된 권위있는 박물관이다.

제임스가 박물관을 찾은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고 사실 아버캠프의 원본이 그미술관에 비치되어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었다. 항구를 뒤로하고 암스테르담 시내를 한가히 걷던 제임스에게 갑자기 웅장한 붉은색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라익스 박물관이란다. 그는 자석에 이끌리듯 들어갔다. 험상궂고 근엄한 경비의 감시하에 5백여년이 넘는 작품들을 조심스럽게 감상하던 중 2층에 이르렀을 때였다.

액자 아래 분명히 아버캠프라고 쓰인 글씨가 시야에 들어왔고 제임스의 발은 자연스럽게 그 앞에 멈추었다. 골프 원서에서 그의 작품 한쪽 켠에 거의 예외없이 묘사되어 있던 콜벤을 즐기는 장면이 혹시 이 작품에도 있을까?. 유심히 살펴보던 그의 눈에 그림속에 있는 4명의 골퍼가 어김없이 들어왔다. ‘그럼 그렇지, 아버캠프가 그림에서 골퍼들을 빼놓을 리가 없지.’

작품에는 백 여명 이상이나 되는 시민들이 등장한다. 마차를 끌고 가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는 모습이며 4명이 기차놀이를 하듯 한줄로 스케이트를 지치고 있기도 하다. 스케이트를 신고 다정하게 가고 있는 부부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아낙네들의 모습도 있다. 스테이트를 지치다가 넘어지는 모습도 있고 신발끈을 고쳐 매는 장면도 있다.

화가는 적나라한 묘사도 서슴치 않는데 왼쪽 하단에 얼어 죽은 말의 시체를 뜯어먹는 개와 까마귀의 모습과 아이를 안은 채 이를 지켜보는 아낙의 모습도 사실 그대로 그려져 있다. 우리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장면은 그림 정 중앙이다. 정박된 작은 쪽배 위의 4명이 분명히 골프채를 들고있다. 왼손잡이 한 명이 티샷을 하고 나머지 3명은 이를 보고 있다. 물론 목표물은 수백 야드 떨어진 페어웨이가 아니라 그림에서는 앞에 있는 쪽배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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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익스박물과에 선시된 당시 네덜란드 겨울 풍경. 스케이트 타는데 오늘날 골프채를 들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 골프의 전신인 콜벤은 10미터 앞 정도의 얼음판에 말뚝을 세워놓고 누가 적은 타수로 가까이 가거나 맞추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얼음판 위에서의 골프놀이 장면은 당시 네덜란드의 풍경화에 많이 등장한다. 그림에 묘사된 장면은 얼음 위에서 하는 골프놀이가 분명하지 않은가.

그림의 중간 쯤에는 한 사람이 골프채를 든채 스케이트를 타고 앞으로 오는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부부로 보이는 두명이 골프채를 가로 들고 다정하게 가는 뒷모습도 역시 보인다. 4백 여 년 전의 화가는 그의 그림마다 이처럼 골프치는 모습을 그려넣으면서 네덜란드가 수백 년 전부터 골프를 창시한 나라임을 암시하거나 입증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2세기 경 네덜란드는 스코틀랜드보다 강국이었고 무역상들은 암스테르담 항구에서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스 항구로 교역물들을 가져갔다. 그 와중에 골프채와 공도 함께 교역물품에 속해있었다는 문헌도 존재한다. 그 무역상들이 여러 날 세인트 앤드루스에 머무는 동안 가져간 골프채와 공으로 놀이를 했을 것이며 스코틀랜드인들이 이를 흉내내지 않았을까.

귀머거리이며 벙어리로 알려진 핸드릭 아버캠프(1585-1634)는 암스테르담의 겨울 풍경화 만을 고집했던 화가로 네덜란드에서는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렘브란트 만큼이나 알려진 명망있는 중세의 화가이다. 벽에 걸려있던 작품은 1608년에 그린 ‘아이스 스케이트를 타는 겨울풍경’ 이다.

제임스는 라익스 뮤지엄 기념품점에서 아버캠프의 겨울 풍경 포스터를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무려 10여 종의 각기 다른 겨울 풍경을 구입했다. 우연히 발견한 박물관에서의 4백 년 된 작품 원본을 본 사실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지 않은가. 골프의 기원에 대한 6백 년 역사를 돌아보게 한 계기가 되게 만들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어서 비록 복사본이지만 1백장을 사면 어떠랴 싶어 구입한 것이었다.

내친 김에 제임스의 우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척에 위치해 있던 새로 건립한 고호박물관 역시 그의 가슴을 끌어당기는 마력이었다. 거침없이 들어가서 맨 먼저 찾은 것은 해바라기였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고호의 해바라기. 바로 30센티미터 코앞에서 바라보는 해바라기의 원본. 가로 세로 30cm 겨우 넘는 작은 그림이지만 제임스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마저 글썽였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코앞에서 바라볼 줄이야’

제임스는 다시 한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가 잘린 고호의 자화상이며 농촌 풍경, 고호 생전에 거처했던 의자가 있는 방, 등등 습작까지 무려 6백 여점의 고흐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뿐이랴. 고흐의 절친이었던 고갱, 타이티 섬에서 그린 원본 작품 수백 점도 고흐 그림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지 않은가. 고흐가 프랑스인이 아닌 네덜란드인이었다는 사실도 다늦은 나이에 알게 됐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추억은 너무도 값진 것이었다고 제임스는 환호했다.

* 필자 이인세 씨는 미주 중앙일보 출신의 골프 역사학자로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우승을 현장 취재하는 등 오랜 세월 미국 골프 대회를 경험했고 수많은 골프 기사를 썼고, 미국 앤틱골프협회 회원으로 남양주에 골프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저서로는 <그린에서 세계를 품다> <골프 600년의 비밀> 이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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