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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마스터스의 독재자’ 클리포드 로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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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클리포드 로버츠.


“클리포드 로버츠가 없었다면, 오늘의 마스터스 대회는 없었을 것이다.”

1930년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고 28세에 깜짝 은퇴한 보비 존스가 개최한 마스터스 대회는 지구촌 최고의 골프 이벤트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꼭 알아야 할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클리포드 로버츠(Clifford Roberts, 1894~1977)다.

마스터스는 1934년 제1회 대회 때는 평범한 골프 대회였고, 우승자에게 상금 1,500달러를 못 줄 정도로 재정이 어려웠다. 그런데 보비 존스의 뒤에서 대회를 지휘했던 혁신적인 경영자 클리포드 로버츠가 마스터스를 세계 최고로 만들었다. 자기의 골프장을 건설해, 멋진 대회를 개최하고 싶었던 보비 존스의 꿈을 로버츠가 실현시켜 준 것이다. 마스터스를 앞두고 로버츠의 경영혁신과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조명해봤다.

운명적인 만남

로버츠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부모가 모두 자살했고,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포기하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을 떠돌아다니며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던 로버츠는 뉴욕에 도착했다. 주식을 사고 팔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로버츠는 주식 브로커가 되어 30세에 이미 큰 돈을 벌었다.

1931년 뉴욕을 방문한 보비 존스와 만난 로버츠는 존스가 미국 최고의 골프장을 건설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존스의 명성을 앞세워서 골프장 건설에 투자한다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로버츠는 동업을 제안했다. 로버츠의 능력을 알고 있었던 존스가 동의해 두 사람은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을 공동 창업했다. 이후 평생 동업자의 길을 걷는 둘은 성장 배경과 성격이 정반대였다.

로버츠의 인생은 보비 존스를 만났던 날에 새로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로버츠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을 건설한 후에는 잊고 싶은 기억들로 가득 찬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결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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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업자 관계였던 보비 존스와 클리포드 로버츠(오른쪽).


‘신의 한 수’ 마스터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코스는 1933년 완성됐다. 골프장 부지 45만 평을 매입한 후 최고의 골프장을 만들어서 미국 전역에 있는 부자들에게 회원권을 팔아 건설 비용을 충당하겠다는 로버츠의 계획은 당시의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서 크게 차질이 생겼다. 1,800명의 멤버를 모집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겨우 76명의 멤버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자금 확보가 안 되자 골프장은 파산 상태가 되었고, 로버츠는 골프코스 주변의 땅을 주택부지로 매각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판매가 저조했다.

로버츠는 골프장을 홍보하기 위해 US 오픈 개최를 희망했지만, 미국골프협회(USGA)가 동의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골프클럽이 자체 대회를 개최하는 방법뿐이었다. 1934년 제1회 대회는 명칭이 ‘오거스타 내셔널 인비테이셔널’이었고 초청장을 받은 유명선수들은 존스도 함께 플레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부분 참가했다. 은퇴 후 절정의 기량에서 퇴보하던 존스는 플레이를 원치 않았지만, 로버츠의 강력한 설득으로 출전하게 됐다.

제1회 대회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대회가 끝난 후 20명의 새로운 멤버가 들어왔고 입회비 만으로 6,000달러가 입금되어 채권자들의 이자를 갚을 수 있었다. 미디어의 반응도 US 오픈 보다 좋은 분위기의 대회였다는 호평이었다. 이제 방향은 명확해졌다. 매년 대회를 개최하여 멤버를 확보하고 수입을 늘려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로버츠는 최고의 대회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연구했다. 1939년부터 대회의 공식명칭을 이미 미디어가 사용하던 ‘마스터스’로 변경했다. 존스는 이 명칭이 겸손하지 않다고 반대했지만 로버츠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클리포드 로버츠의 혁신

로버츠는 제1회부터 대회장이 되어 모든 진행을 꼼꼼하게 챙겼다. 그의 신념은 확실했다. ‘마스터스에서는 무엇이든 완벽하고 최고이어야 한다’였다. 당시의 다른 골프대회에서 진행되던 기본개념들을 모두 검토하여 마스터스에 새로 적용했다. 지금은 당연하게 보이지만 마스터스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변화들은 아래와 같다.

- 4라운드를 4일에 걸쳐 개최. 당시에는 3, 4라운드를 3일째에 끝냈다.
- 선수의 성적을 오버-언더파 기준으로 결정. 언더 파의 점수는 빨간 색, 오버 파의 접수는 초록색으로 표시했다. 당시에는 그 홀까지의 총 타수만 있었다.
- 갤러리 로프를 설치하여 선수와 분리.
- 코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리더보드 설치하고 전화라인을 연결.
- 2인 1조 플레이 도입. 당시에는 3인 1조만 있었다.
- 그랜드 스탠드 최초설치.
- 당일 티 타임표 인쇄 배포.
- 그린 주변의 지형을 관중이 잘 볼 수 있도록 언덕을 만드는 것으로 변경.
- 최초로 전국 라디오 중계.
- 1만 대 이상을 주차할 수 있는 대형주차장 확보.

이밖에도 갤러리를 위해 식음료 스탠드와 화장실을 충분히 설치해 편안한 관전이 가능하도록 했다. 마스터스 관전을 위해 먼 길을 온 손님들에게 좋은 음식을 값싸게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 로버츠의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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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지 못하는 보비 존스를 안내하고 있는 클리포드 로버츠(오른쪽).


독재자가 된 로버츠

세월이 흐르면서 마스터스가 점점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더 많은 선수와 기자들이 초청장을 받고 싶어했다. 로버츠는 자기의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선수와 기자를 초청했는데 마스터스에 불만을 표시하거나, 비난하는 기사를 쓰면 다음 초청대상에서 제외됐다. 어떤 선수는 연습라운드 때 여러 개의 어프로치 샷을 했다는 규정위반으로 대회 출전이 금지됐고, 어느 아마추어 선수는 나팔바지를 입은 옷차림이 문제되어 새 옷을 사야 했다. TV 중계 방송에서 적합하지 않은 용어를 쓴 해설자가 퇴출되기도 했고, 방송중계의 광고시간을 제한하기도 했다. 모두 로버츠가 내린 결정이었다.

로버츠의 허락이 없이는 손바닥만한 잔디도 제거할 수 없고, 한줌의 모래도 뿌려서는 안 되며, 그린을 깎을 때도 반드시 그의 허락이 필요했다. 골프계에서는 로버츠를 ‘마스터스의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로버츠는 1948년 아이젠하워 장군을 멤버로 초대해 골프를 치며 친분을 쌓았다. 1952년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선거운동과 자금지원을 하였고, 대통령 당선 후 백악관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골프팬들에게 마스터스는 보비 존스의 대회였고 로버츠의 존재는 언제나 커튼 뒤에 숨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로버츠가 바라는 그림이었다.

로버츠는 대표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내가 살아있는 한 마스터스의 캐디는 흑인이고, 선수는 백인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리 엘더라는 선수가 흑인 최초로 1975년 마스터스에 초청됐다. 인종차별을 중지하라는 여론의 압력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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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우승자들을 새긴 기념탑 앞에서 포즈를 취한 존스와 로버츠(오른쪽).


마지막 업무와 권총 자살


1976년 82세의 로버츠는 43년 동안 머물렀던 마스터스 대회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1977년에 말기 암 판정을 받은 로버츠는 죽기 전에 마스터스를 위해 꼭 마무리해야 하는 하는 마지막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1933년 파산에 몰렸을 때 골프장 주변의 땅을 딱 한 곳 팔 수 있었는데, 그 곳은 1번홀 그린 뒤였다. 땅을 매입한 사람이 아주 큰 저택을 지어서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서면 그린 뒤로 그 집이 보였다. 오거스타 내셔널의 어떤 홀에서도 주택이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그 집이 로버츠의 마음에 걸렸다. 로버츠는 결국 제3자를 통해 그 집을 매입해 흔적을 없애라고 명령했다.

1977년 9월 뉴욕을 출발해 오거스타 내셔널 클럽하우스에 도착한 로버츠는 매니저를 불러 자기를 1번홀 티잉 그라운드로 부축해 달라고 요청했다. 티잉 그라운드에 서서 1번홀 그린 뒤에 있던 주택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로버츠는 만족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 날 밤 로버츠는 뉴욕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하여 다음 날 오전에 오거스타행 비행기를 타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파3 코스의 8번 홀 연못가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시체가 발견된 지점은 쉽게 사후 수습이 될 수 있는 완벽한 위치였다. 로버츠의 책상 위에는 유서 대신 말기 암으로 치유가 어려운 상태라는 의사의 소견서가 남겨져 있었다. 무덤을 남기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한 재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 뿌려졌다. 빈틈 없이 업무를 처리했던 로버츠의 스타일은 죽을 때까지 계속됐던 것이다.

지금도 마스터스 대회에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 대회 운영위원회가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이는 “클리포드 로버츠가 살아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가 골프에 끼친 영향은 오늘날의 모든 골프대회에 살아 있다.

* 박노승 씨는 골프대디였고 미국 PGA 클래스A의 어프렌티스 과정을 거쳤다. 2015년 R&A가 주관한 룰 테스트 레벨 3에 합격한 국제 심판으로서 현재 대한골프협회(KGA)의 경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건국대 대학원의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역사와 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위대한 골퍼들의 스토리를 정리한 저서 “더멀리 더 가까이” (2013), “더 골퍼” (2016)를 발간한 골프역사가이기도 하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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