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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장정구라 쓰고, 전설이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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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복싱대통령'으로 불릴 만한 장정구 챔프.


오늘 링사이드 산책의 주인공은 한국인 최초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장정구(62년생, 부산)입니다. 1927년 조선권투구락부가 성의경 씨에 의해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설립되면서 한국복싱의 역사가 시작됐고, 이후 83년 만인 2010년 장정구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야말로 한국 복싱의 아이콘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챔프 장정구는 한국복싱 100년사에서 프로복싱이 품고 있던 고질적인 난제를 해결해 많은 사랑을 받은 인물입니다.

먼저 장정구가 타이틀을 획득한 1983년으로 가 보죠. 이 해는 노래 제목 끄트머리에 ‘개’가 들어있던 3곡이 공전의 히트를 친 해입니다. 이태원의 <솔개>와 허영란의 <날개 >, 이동기의 <논개>가 사랑을 받았죠. 이해 3월 26일 벌어진 WBC 라이트플라이급 타이틀전에서 장정구는 2차례에 걸쳐 15차 방어에 성공한 특급챔피언 일랄리오 사파타(파나마)와 대결해 승리합니다. 장정구는 사파타를 향해 쉼없는 강타를 쏟아부은 끝에 3회 KO승을 거두며 대한민국의 제12대 세계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아울러 그동안 지속되어온 한국의 세계타이틀 11연패의 사슬도 끊어냈죠. 장정구가 연패를 끊지 못했다면 세계타이틀 도전 사상 16연패라는 일본의 기록을 한국이 깰 수도 있었기에 몹시 가슴 졸이며 경기를 지켜봐야 했죠.

롱런 챔피언에 대한 갈망도 장정구에 의해 해소됐습니다. 장정구에 앞선 선배 챔피언들인 김기수와 홍수환, 유제두, 염동균, 김성준, 김상현, 박찬희, 김태식, 김환진, 김철호 등은 대부분 2~3차 방어전에서 벨트를 풀었죠. 박찬희와 김철호가 5차 방어에 성공한 것이 당시 최다방어 기록이었습니다. 장정구는 장정구는 한국복싱의 지상 과제이자 해묵은 숙제를 풀며 15차 방어의 대업을 이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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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방어전에서 일본의 도카시키를 링바닥에 눕히고 있는 장정구 챔프.


일본의 저명한 복싱 평론가인 조 고이즈미는 일본의 복싱잡지에 <해외 톱복서 기술분석 장정구 편>에서 “장정구는 세계에 감히 자랑할 수 있는 뛰어난 동양인 복서‘라고 극찬했습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복싱잡지이자, 동양인에게 유난히 박하고 칭찬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미국 <링>지도 무려 6페이지를 할애하며 장정구를 특집기사로 다뤘고, 이례적으로 ’한국의 매‘라는 별명을 붙이며 한국인 최고의 복서로 선정했습니다. 또한 1985~87년 3년 연속 WBC 최우수복서로 선정됨은 물론 1993년에 선정한 세계 최우수복서 27인 중 한 명으로 꼽혔습니다.

장정구는 42전(38승<17KO>4패)을 싸웠는데 그중 20차례가 세계타이틀전이었고, 세계챔피언을 지낸 복서 12명과 무려 17차례나 격돌해 13승 4패라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순도 면에 아주 높은 퀄리티를 보인 겁니다. 챔피언 출신 12명을 나열하면 일라리오 사파타와 알폰소 로페즈(파나마), 헤르만 토레스, 아만도 우루수아, 이시드로 페레스, 움베르토 곤잘레스(이상 멕시코), 도카시키 가쓰오, 오하시 히데유키(이상 일본), 무앙차이 키티카셈, 소트 치타라타(이상 태국), 정종관, 신희섭(이상 한국)이었죠.

헤르만 토레스는 장정구에 대해 “몸놀림이 유연하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복서였다”며 “의외로 펀치력도 강했다”고 호평했죠. 도카시키 가쓰오도 “귀감이 될 만한 최고의 복서”라고 극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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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구 챔프(왼쪽)과 필자(가운데), 그리고 장정구 챔프의 가까운 선배 황충재(맨 오른쪽).


장정구의 장점은 어떤 상대,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의 스타일에 따라 전략과 전술을 유기적으로 구사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예로 들어보죠. 만일 장정구가 거북이의 입장이었다면 장정구는 결코 산에서 토끼와 뜀박질로 경주를 펼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고요? 우스갯소리로 “장정구는 짱구(?)가 아니기 때문이죠”. 장정구가 거북이의 입장이었다면 토끼하고 물 속에서 레이스를 펼쳐 승부를 걸었을 겁니다.

이처럼 장정구는 철저하게 이기는 복싱, 지지않는 복싱을 구사했습니다. 장정구의 복싱 아이큐는 상당히 높았죠. 장정구는 멕시코의 강타자인 헤르만 토레스(80전63승<47KO>4무13패)와 우루수아(55전34승<21KO>21패)와의 경기, 그리고 파나마 출신으로 허리가 유연한 기교파 알폰소 로페즈(59전39승<22KO>2무18패)와 사파타(54전43승<14KO>1무10패)와의 경기를 분석하면 장정구의 전략과 전술이 상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복서였던 김태식이 파나마의 기교파 복서인 루이스 이바라(23승<14KO>1패)를 2회 무자비한 함포사격으로 KO시키며 정상에 올랐지만, 멕시코의 강타자인 아벨라(20승<15KO>1무8패)에게 똑같은 패턴으로 일관하다 안타깝게 2회에 KO패를 당한 것을 고려하면 장정구의 위대함은 더욱 빛납니다.

김태식과 아벨라의 KO률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일본 및 동남아 선수들을 주로 상대한 김태식과 수준 높은 복싱의 본고장인 중남미에서 강타자들과 맞대결해서 얻은 아벨라는 전적만 보고 판단하면 큰 오산입니다. 이런 디테일을 인지하고 장정구는 철저하게 이기는 방법으로 전략과 전술을 구사했던 지능적인 복서였습니다.

장정구가 국내 챔피언 중 최초의 두 자릿수 방어에 성공하며 15차 방어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은 이렇게 끊임없이 연구하며 진일보된 작전을 구사해 상대를 압박해 나갔기에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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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구 챔프의 가족사진.


1985년 어느 날 장정구 챔프는 필자가 속한 영등포의 88체육관을 내방해 스파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상대는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의 황동룡(62년 군산)으로 전국체전과 대통령배 등에서 우승하는 등 당시 88체육관 최고의 유망주였습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2명의 스파링 파트너를 상대로 6회전을 치렀는데 두 번째 파트너로 올라온 황동룡이 스파링 도중 장정구의 뒷통수를 가격하자 장정구는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처음 상대한 황동룡이 생각 이상으로 좋은 기량을 선보이며 만만찮게 반격하자 장정구는 20일 후 88체육관에 다시 나타났고 황동룡과 6회 맞대결을 요구했죠.

그 스파링에서 1회 장정구의 분노에 찬 강타가 터지자 황동룡은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어 경기가 잠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후 장정구의 완벽한 페이스로 진행되며 스파링은 마무리됐죠. 장정구는 20일.동안 황동룡을 연구했고 첫 격돌 때와 전혀 다른 공격스타일로 상대를 압도했던 겁니다. 장정구는 그런 복서였습니다.

그날 밤 황동룡의 사범과 매니저인 이영래, 김철호 두 사람은 진노한 심영자 회장에게 질타를 들었다는 후문입니다. 당시 황동룡은 예전에 필자가 이 코너에서 <유명우에 앞선 천재복서 황동룡 편>에 소개할 정도로 테크닉과 체력이 매우 뛰어난 복서였습니다. 아마추어 시절 권채오(60년생, 한국화약), 박제석(63년생, 웅비), 윤석환(62년생, 대구 대산), 오경묵(65년생, 한영고) 등을 꺾었던 88체육관의 미래였죠.

후에 황동룡은 필자에게 “장정구는 언제 어디서 손이 나올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어 어느 타이밍에 어떤 펀치를 구사해야 할지 몰라 타점 맞추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국내복서 중 최고의 실력파라 평한 것이죠. 그래서였을까요? 어느 기자는 장정구의 복싱을 ‘어디서 불어올지 모르는 바람’이라고 정의한 적도 있었죠.

5년 3개월의 챔피언 재위기간 동안 마지막 15차 원정 방어전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도전자 오하시 히데유키를 7차례나 링 바닥에 누이고 8회 KO승을 거뒀죠. 외국에 나가서도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겁니다. 필자가 인정할 만큼 높은 식견을 지닌 복싱마니아 한 분은 복싱 카페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70년대 들어 이창길, 허버트강, 김현치, 김태호, 오영호 등이 있었지만 국내 복서 중엔 홍수환만 눈에 들어왔다. 80년대 들어 장정구가 들어오자 홍수환도 김태식, 김상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장정구를 보고 처음으로 세계적인 레벨의 복서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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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구 챔프를 후원하고 있는 임종대 사장, 장정구 챔프, 신정훈 관장(좌측부터).


필자는 이런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복서 장정구에게 2013년 3월 26일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날은 장 챔프의 세계타이틀 획득 30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었기 때문이죠. 필자의 생각으로는 홍수환 선배처럼 성대하게 이벤트성 행사를 개최한 줄 알았죠. 그러나 우리의 장 챔프는 텔런트 현석 님의 아들인 백승욱 군과 잠실 모처에서 단둘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더군요. 순간적으로 울컥했습니다. ‘장정구에게 한국 복싱이 진 빚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다음 해부터 장정구 챔프 타이틀 획득 기념일을 주최하기로 결심했고 31주년부터 실행에 옮겼죠.

많은 권투인들이 참여하는 모임을 대행사와 소행사로 나눠 10여 차례 이상 주선했습니다. 장정구의 모든 업적을 하나로 축약한 것이 바로 한국인 최초의 명예의 전당 헌액입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이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위대한 복서 평가 받는다는 사실을 웅변합니다. 지난 우리 역사 속에서도 많은 영웅들이 할거했지만 성웅은 이순신 장군 한 분만 존재하듯이 그 많은 복싱 스타들 중에서 그래도 진정한 슈퍼스타는 장정구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를 ‘그레이트 챔프’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 한 해를 마감하는 링사이드산책의 주인공으로 장정구 챔프를 소개하는 것에 가슴 한 켠이 뿌듯함을 느낍니다. 한 해 동안 열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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