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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골프 최초의 수퍼스타 해리 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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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그 영향이 남아 있는 골프계의 첫 수퍼스타 해리 바든.


근대 골프 역사는 해리 바든(Harry Vardon 1870~1937)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든은 새로운 스윙 테크닉을 가지고 나타나서 영국과 미국의 골프를 평정했다. 바든이 나타나기 전의 스윙을 ‘세인트 앤드루스 스윙’이라고 부른다. 클럽을 느슨하게 잡고 낮은 스윙을 하며 백스윙 때 몸을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심한 스웨이를 했다. 결과적으로 볼은 낮게 날아가며 훅이 났고 링스 코스에서 끝없이 굴러갔다. 그러나 바든이 개발한 새로운 스윙은 하체를 사용하여 몸을 회전시켰고 높은 공을 칠 수 있었다. 깃발을 향해 높이 날아가서 백스핀으로 사뿐하게 멈추는 샷을 처음 본 관중들은 열광했다.

바든은 대서양을 건너다니며 메이저 7승을 올렸고, US 오픈과 디 오픈을 모두 우승한 최초의 선수이다. 그는 골프 스포츠 사상 최초의 국제적인 수퍼스타였다. 그가 유행시킨 오버래핑 그립은 ‘바든그립’이라 불리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대다수 골퍼들의 손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클럽 프로가 된 캐디

디 오픈 6회 우승과 1900년 US 오픈 우승에 빛나는 바든은 잉글랜드의 저지 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캐디를 하며 골프를 익혔다. 17세가 되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원사의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골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80타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던 바든에게 놀라운 소식이 도착했다. 영국 골프장에 취직하여 본토로 간 동생 톰 바든이 골프대회에 참가하여 2등을 하고 상금 12파운드를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바든의 연봉이 16파운드였는데 골프시합 한번으로 12파운드나 되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1890년 동생보다 골프를 잘 쳤던 바든은 망설이지 않고 영국 본토로 가서 9홀짜리 골프장의 프로로 취직했다. 말이 프로지 멤버들을 위해 골프클럽을 닦아서 보관하고, 수리하고, 골프샾을 운영하고, 레슨도 하고 아침 일찍 그린까지 깨끗이 정리해야 하는 고된 삶이었다. 적은 수입으로 살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골프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골프에 필요한 샷들을 하나씩 완성해 나가면서 바든의 기량은 놀랍게 향상됐다.

바든은 낮은 탄도로 날아가서 백스핀으로 그린 위에 멈추게 하는 샷을 최고의 샷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퍼팅이었다. 퍼팅은 다른 샷들만큼 기량이 향상되지 않았다. 퍼팅은 골프 속의 다른 게임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퍼팅이 약하면 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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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바든은 '위대한 삼총사' 중 한 명이었다. 왼쪽부터 제임스 브레이드, 바든, 존 테일러.


바든 그립

1896년 명문 갠턴 골프클럽으로 자리를 옮긴 바든은 본격적으로 프로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골프 스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립이라는 것을 일찍 깨우쳤던 바든은 다른 선수들이 사용하는 모든 그립들을 시험해 보았고, 그 중에서 래들리라는 아마추어 선수가 사용하는 오버래핑 그립이 두 손을 일체화하기 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것을 알았다. 오른손 새끼 손가락을 왼손 검지 위에 올리는 오버래핑 그립은 바든이 수퍼스타가 되면서 자연히 ‘바든 그립’으로 불리게 됐다. 현재도 프로 선수의 70퍼센트 이상이 사용하는 바든 그립은 아마추어 골퍼들에게도 가장 보편적인 그립이다.

1896년 디 오픈 첫 우승과 위대한 삼총사

1894년, 1895년 디 오픈을 연속 제패했던 존 테일러(John Taylor)는 1896년 3년 연속 우승에 도전했다. 뮤어필드에서 만난 바든과 테일러는 하루 36홀씩 이틀간 4번의 라운드가 끝나고 동타가 되어 36홀 연장전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두 선수 모두 다음날 다른 대회에 가야 했으므로 연장전은 하루 더 연기됐다. 다른 대회에서 테일러는 36홀 후 9홀 연장전을 벌이며 우승을 하고 다음날 디 오픈 연장전에 돌입했다. 두 선수 모두 4일 연속 36홀을 쳐야 했으므로 체력이 지쳐있었는데 바든이 4타 차이로 승리하면서 우승상금 30파운드를 받았고 테일러의 3년 연속 우승을 저지했다.

그 이후 바든이 디 오픈 6회 우승, 테일러가 5회 우승, 제임스 브레이드가 5회 우승을 하면서 세 선수가 1894년부터 1914년까지 21년 동안 16회의 우승을 나누어 가지는 3인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역사가들은 세 선수를 ‘위대한 삼총사(Great Triumvirate, 로마시대의 3인 집정체제)’라고 부른다. 특히 바든과 테일러의 오랜 라이벌 대결은 중요한 고비마다 상대의 독주를 막으며 20년 이상 계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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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든을 보지 못했다면 아직 골프를 못 본 것이다'는 말이 있었다. (왼쪽부터)테일러와 브레이드가 바든의 스윙을 지켜보는 장면을 담은 그림.


1900년 디 오픈 패배와 US 오픈 우승

1900년 미국의 스포츠용품 전문기업인 스팔딩이 새로운 골프공을 개발했다. 재질이 고무 (Gutta-Percha)이고 새로운 딤플 디자인을 채택한 공의 이름은 ‘바든 플라이어(Vardon Flyer)였고, 당연히 광고모델로 바든이었다. 당시 계약금액은 상상을 초월하는 큰 금액이었는데, 요즘으로 치면 타이거 우즈와 나이키의 빅딜에 해당한다. 바든은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스팔딩의 골프공으로 시범경기를 했고 투어 외에 별도로 큰 수입을 올리며 점점 부자가 되어갔다.

1898, 1899년 디 오픈에서 연속 우승했던 바든은 1900년 디 오픈의 타이틀 방어를 위해서 미국여행을 중단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영국에서는 “해리 바든을 보지 못했다면 아직 골프를 못 본 것이다”라는 말이 회자될 만큼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열렸던 1900년 디 오픈에서는 숙명의 라이벌 테일러가 바든의 3년 연속 우승을 저지하며 우승했고, 바든은 2위로 만족해야 했다. 테일러의 3년 연속 우승을 저지했던 바든이 이제 거꾸로 자기의 3연속 우승을 저지 당한 것이다.

다시 미국으로 간 바든은 1900년 US 오픈에 출전할 계획이었다. 미국의 신문들은 바든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발 변수가 생겼다. 테일러도 이번 US 오픈에 참가한다는 소식이었다. 미디어에서는 두 선수의 라이벌 관계가 미국에서 까지 연장되며 미국 선수들은 3등을 위한 대회 참가일 뿐이라고 보도했다. 대회가 시작되자 예상대로 두 선수의 선두경쟁이 치열했는데 결국 바든이 2타 차로 2위 테일러를 제압하고 그의 유일한 US 오픈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바든은 1913년 US오픈에서 미국의 무명 아마추어 프란시스 위멧에게 패배하며 2위를 했고, 1920년에도 준우승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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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바든이 유행시킨 니커스 바지.


누가 먼저 디 오픈 6승을 할 것인가? 1914년 디 오픈

1913년까지 바든, 테일러, 브레이드는 똑같이 디오픈 5회 우승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마흔 세 살이 된 바든과 테일러, 그리고 한 살 아래인 브레이드는 모두 전성기가 끝나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1914년 디 오픈에서 6승의 고지를 선점하는 선수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도 확실했다.

세 선수는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1914년 디 오픈 장소인 프레스트윅 골프클럽 모였다. 첫 라운드에서 바든이 선두에 나서고 테일러와 브레이드가 1타차 2위로 따라가며 선두경쟁이 치열했지만 결국 바든이 테일러를 2위로 밀어내며 6승 고지에 올랐다. 20년 넘던 라이벌의 대결도 끝이 났다. 1915년부터 1919년 까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디 오픈 개최가 중단되었고 다시 개최된 1920년에는 세 선수 모두 50세에 가까워 우승경쟁이 어려웠다.

해리 바든이 남긴 역사적 발자취

해리 바든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오버 래핑 그립으로 남아 있다. 또 골프 복장을 선도하는 니커스(knickerbockers)라는 바지를 입었는데 이를 미국까지 유행시켰다. 미국에서는 이 바지가 무릎아래로 4인치 내려오는 길이라 하여 ‘플러스 4’라고 부른다. 바든은 근대 골프스윙의 테크닉과 프로 골퍼의 직업관을 확립한 선구자였다. 미국의 PGA 투어와 유러피안 투어에서는 바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바든 트로피를 만들었고, 매년 최저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시상하고 있다.

* 박노승 씨는 골프대디였고 미국 PGA 클래스A의 어프렌티스 과정을 거쳤다. 2015년 R&A가 주관한 룰 테스트 레벨 3에 합격한 국제 심판으로서 현재 대한골프협회(KGA)의 경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건국대 대학원의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역사와 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위대한 골퍼들의 스토리를 정리한 저서 “더멀리 더 가까이” (2013), “더 골퍼” (2016)를 발간한 골프역사가이기도 하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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