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박종팔 백인철 나경민과 맞짱뜬 ‘구월산 유격대’ 노창환
이미지중앙

박종팔과 노창환(오른쪽)의 1차전 포스터.


오늘 소개할 복서는 한국복싱의 중량급인 미들급에서 한시대를 풍미했던 박종팔(58년생 무안) 백인철(60년생 고흥) 나경민(55년생 춘천) 트리오와 불꽃튀는 5연전을 펼쳤고, 이후 그들의 뒤를 호시탐탐 노리던 차세대 에이스 김의진(63년생 88프로모션, 1882년 아시아선수권 라이트미들급 금메달), 문정원(63년생 해태, 1981년 통합 신인왕) 등과 모두 7차례 격돌하며 명승부를 연출한 노창환(61년생 신도체)입니다. 그의 별명은 ‘구월산유격대’였죠.

모처럼 그를 만나러 백달근, 김용훈 관장과 함께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위치한 소리봉 가든으로 향했습니다. 이 음식점은 노창환 씨 부부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도착하기 전 인근 포천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전 동양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인 정선용(65년생 파주) 관장이 합류, 총 4명이 노창환의 복싱비화를 함께 경청하게 됐습니다.

이미지중앙

왼쪽부터 김용훈 관장, 노창환 챔프 부부, 백달근 관장.


구월산 실향민의 아들


노창환의 부친은 황해도 구월산 기슭에서 과수원을 하다가 6.25전쟁 때 월남,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 정착해 목장을 운영했던 실향민이었습니다. 노창환은 이곳에서 나고자란 토박이 복서였습니다. 노창환은 어렸을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구월산의 향수를 전해들었죠. 한때 ‘구월산’이라는 간판으로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영화로도 제작된 구월산 유격대는 6.25전쟁 당시 황해도 기독교 청년들과 1.4후퇴 때 남하하지 못한 국군이 구월산에 들어가 전투를 벌였던 비정규직부대입니다. 이들은 일본군이 쓰던 구식장총을 들고, 엄동설한에도 홑바지저고리만 걸치고, 신발도 없이 짚신에다 광목천을 둘둘말아 돌아다니면서 인민군과 최후까지 처절하게 항전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링사이드산책 주인공인 노창환은 구월산 유격대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부친의 고향과 그의 복싱사가 묘하게 겹치는 것입니다.

노창환은 학창시절 힘이 좋아 씨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광동고에 진학했는데 때마침 부임한 복서 출신의 이몽현(47년생 군산) 교사가 복싱부를 창단했고, 이듬해인 1978년 광동고 2학년 때 정식복싱에 입문합니다. 1년 선배가 후에 동양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이수항과 밴텀급의 중견복서인 김익겸이었습니다. 이들 삼총사는 링도 없는 학교강당에서 복싱을 수련하면서도 전국무대에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지만, 이몽현 교사가 서울 일신여상으로 발령이나자 복싱부가 해체됐습니다.

1980년 광동고를 졸업한 노창환은 이수항, 김익겸이 프로생활하던 청량리 신도체육관(조순현 관장)으로 들어가 그해 4월 프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4회 판정패로 데뷔전에서 아픔을 겪었지만 노창환은 그해 5월 제1회 KBS 미들급신인왕에 오름과 동시에 한일 신인왕전에서도 승리하며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미지중앙

김의진과 타이틀전을 벌이는 노창환(오른쪽).


뚝심과 근성의 복서


노창환은 전형적인 파이터였습니다. 스피드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일팔필도를 장착한 한방(?)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근성과 뚝심이 발군이었죠. 마치 구월산 유격대처럼 불퇴전을 감행하며 치열한 난타전을 벌여 인기가 높았습니다. 실제로 노창환은 링에 오르기 전 세컨에게 꼭 한마디를 던지곤 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타올은 던지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후 임창일 유병래 나경민 장병인 등 중견복서들과 승패를 주고받으며 관록이 붙은 노창환은 1984년 2월 문정원(당시 해태 소속)과 한국 미들급타이틀 결정전을 벌입니다. 문정원은 세계챔피언 출신의 유제두 관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복서로 당시 10승(7KO)2패를 기록 중인 유망주였고, 노창환은 3승(1KO)5패1무로 평범했죠. 당연히 예상도 8ㅡ2로 문정원의 일방적인 우세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경기가 시작되고 문정원의 맹공에 노창환이 2회 처절하게 쓰려졌을 때 경기는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노창환은 일어섰고,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끝내 8회부터 전세를 역전시키면서 극적인 판정승을 거뒀습니다. 경기 후 어이 없는 애제자의 패배에 유제두 관장의 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어 그해 6월 치러진 1차방어전의 상대는 1982년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아시아선수권 금메달을 획득한 김의진이었습니다. 이때도 노창환은 평소 김의진과 스파링에서 일방적으로 난타당했기에 모든 면에서 일방적인 열세로 전망됐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자 예상대로 스커드 미사일처럼 터지는 김의진의 맹공에 노창환은 역시 2회에 허물어졌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회생하며 후반전세를 역전시키며 극적으로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필자도 이 경기를 현장에서 관전했는데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노창환의 경기는 항상 외줄을 타는 듯한 스릴이 느껴졌습니다. 당연히 인기가 높았죠.

이미지중앙

거함 나경민을 쓰러뜨리는 노창환.


구월산 명승부 열전


김대겸을 꺾고 2차방어에 성공한 후 노창환은 1985년 2월, 당시 박종팔과 1승1패를 주고 받았던 미들급 동양챔피언 나경민(16승<15KO>3패)을 상대로 4회 절묘한 라이트훅 한 방을 작렬하며 KO승을 거뒀습니다. 13개월 전 4회KO패를 같은 라운드에 앙갚음한 것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노창환은 2개월 후 박종팔과 라이벌전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사실 말이 라이벌전이지 세계타이틀방어전을 앞둔 박종팔 입장에서는 워밍업 파트너였죠. 노창환에 따르면 박종팔은 전날 기자회견 때 태연하게 담배를 피울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통산전적 46승(39KO)2무5패의 당시 IBF 슈퍼미들급 챔피언인 박종팔에겐 7승(2KO)5패1무의 노창환은 너무나 약한 상대였죠.

하지만 뚜껑을 열자 예상을 깨고, 마치 막강미군을 향해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베트콩처럼 노창환은 터프한 경기력으로 박종팔을 상당히 괴롭힙니다. 이렇게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며 12회까지 갔지만 판정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 경기 후 노창환은 사실상 은퇴를 선언합니다. 어쩌면 이때 영원한 흙수저의 비애가 그의 가슴에 품어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풍전호텔에서 합숙하며 체계적으로 훈련하는 박종팔에 비해 합숙훈련은커녕 시골에서 체육관(청량리)까지 비포장길로 왕복 3시간에 걸쳐 출퇴근 해야 하는 노창환은 영세체육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결국 노창환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김익겸의 친형이 운영하는 나이트클럽의 지배인으로 생활했습니다. 이렇게 직업전선에서 8개월을 근무하던 1985년 12월 어느날 동아프로모션의 김현치 회장은 700만 원의 파이트머니를 앞세워 노창환을 유혹합니다. 신정(1월1일) 특선라이벌전으로 박종팔과 리턴매치를 기획한 것이죠. 노창환은 부랴부랴 상경해 불과 20일을 훈련한 후 경기를 치렀고, 무려 6차례나 링바닥에 뒹굴면서도 백기를 들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며 9회까지 버텼습니다. 주심이 중단하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싸울 것같은 기세였습니다. 박종팔은 경기후 인터뷰에서 “주먹이 아플 정도였다. 쓰러져도 오뚜기처럼 일어나니 징그러울 정도였다”고 회고했죠. 노창환이 링에서 내려오자 팬들의 사인공세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 팬은 백마고지 전투처럼 처절한 난투극이라고 말하며 노창환의 정신력에 박수를 보낸다고 일성을 토하기도 했죠. 노창환은 그해 7월 백인철(종신전적 47승<43KO>3패)과의 은퇴경기에서도 극동 전호연 회장이 400만원의 파이트머니를 제시하자 단 10일을 훈련하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역시 4차례나 쓰러지면서도 5회까지 버텨 화제가 됐습니다.

이미지중앙

정선용 관장과 노창환 챔프(오른쪽).


복서와 산


노창환은 평소 “나는 박종팔처럼 강타자도 아니고, 백인철처럼 세기가 뛰어난 것도 아니지만 강한 정신력만큼은 뒤지고 싶지 않다”고 피력하곤 했습니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전국의 4대명산(금강산 지리산 구월산 묘향산)에 대한 평가에서 구월산을 불수부장(不秀不壯) 즉, 빼어나지도 않고 장엄하지도 않다고 평했습니다. 박종팔과 백인철에 비해 상대적으로 펀치력과 세기가 다소 부족한 노창환과 비슷한 산인 듯합니다.

노창환은 맞상대한 복서 중 최고의 복서로는 단연 박종팔을 꼽았습니다. 해머 같은 펀치력에, 필살기인 레프트 복부공격은 세계적이라고 평했습니다. 서산대사가 묘향산을 장엄하면서 빼어나기까지 하다고 평했는데 박종팔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백인철은 강펀처는 아니지만 송곳처럼 쑤시는 펀치가 일품이었는데, 그렇다면 수려하지만 장엄하지 않다고 표현한 금강산에 해당되겠군요. 끝으로 나경민은 펀치력은 함포사격처럼 위력적였지만 단조로운 공격패턴과 함께 턱이 들리는 등 세기가 부족했습니다. 산으로 말하면 웅장하지만 수려하지 않은 지리산에 해당되는군요.

인텨뷰 말미에 노창환은 자신의 은사인 이몽현 선생과 복싱선배 김익겸, 이 두 분을 잊을 수 없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당대 최고의 복서들과 처절한 승부를 펼치면서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승리에 겸손했던 진정한 승부사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복싱을 ‘눈물 속에 피는 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문성길복싱클럽관장]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