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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전드 오브 풋볼] ‘갈락티코 1기’의 피해자 3인방

[헤럴드경제 스포츠팀=김유미 기자] 레알마드리드는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의 갈락티코스 정책으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 세계적인 구단으로 발돋움하는 데에 이른바 ‘빅네임’들의 영입이 큰 도움이 됐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호나우두,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데이비드 베컴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동안, 경기장 한 편에는 벤치를 지켜야만 했던 불운의 선수들도 존재했다. 이번 레전드 오브 풋볼에서는 갈락티코 1기에서 빛을 보지 못했던 의문의 피해자 3인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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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투톱이었던 라울 곤잘레스(왼쪽)와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오른쪽). 모리엔테스는 뛰어난 공격수였지만 결국 스타 플레이어들에 밀려났다. [사진=UEFA 홈페이지]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 라울의 환상의 짝꿍

첫 번째 주인공은 공격수 영입에 크게 기울었던 갈락티코스 정책의 큰 피해자였던 페르난도 모리엔테스다. 모리엔테스는 스페인 출신의 스트라이커로, 대표 팀과 레알마드리드에서 공격수로 활약했다. 타깃형 스트라이커로 공중볼에 능했고, 라울 곤잘레스와 호흡을 맞춰 레알마드리드의 공격을 이끌었다.

10대 후반 라리가 알바세테 발롬피에에서 데뷔한 모리엔테스는 레알사라고사로 이적한 뒤 리그 66경기 28골의 활약을 선보였다. 프로 데뷔 5년차였던 97-98시즌에 레알마드리드로 이적했고, 첫 시즌 33경기에서 12골을 터트리며 이름을 알렸다. 선수 인생 첫 빅이어(챔스우승컵)도 이 시즌에 들어 올렸다. 2년차에는 33경기에 출장해 19골을 기록해 팀 내 최다득점 타이틀을 차지했고, 다음 시즌인 99-00시즌 두 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1998년 스페인 국가대표에 처음 이름을 올린 모리엔테스는 2007년까지 10년 간 대표 팀에서 활약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출전했고, 한일 월드컵 당시 상의 탈의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모리엔테스가 한국과의 8강전에서 추가시간 득점했지만 골이 무효 처리되면서 논란을 빚었는데, 비디오 판독 결과 골이었음이 드러나면서 이는 역대 최악의 오심으로 꼽히는 장면이 됐다. 결국 스페인은 승부차기에서 한국에 패배했다. 이후 유로 2004, 월드컵 예선을 소화했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자연스레 은퇴 수순을 밟았다.

00-01시즌에는 33경기 18골로 라리가 득점 2위에 올랐고, 리그 우승컵도 품에 안았다. 레알마드리드에서 5번째 시즌까지도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입지를 다져가던 모리엔테스는 2002년 여름 호나우두의 입단으로 위기를 맞는다. 당시 바르셀로나, 토트넘 등 빅클럽들의 오퍼를 거절하고 잔류를 결심한 모리엔테스는 02-03시즌 라리가 두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03-04시즌이 시작되면서 출장을 보장받지 못한 그는 AS모나코로 임대를 갔고,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았다. 리그앙 28경기에서 10골을 작성했고,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레알마드리드를 만나 합계 스코어 5-5(원정 다득점)로 원 소속팀을 꺾고 결승까지 올라 준우승을 차지했다. 모리엔테스는 이 대회에서 9골로 득점왕이 됐다.

다음 시즌 다시 레알마드리드로 복귀했지만 13경기 출장에 그쳤고 무득점에 그쳤다. 결국 04-05시즌 리버풀로 이적했는데, 리버풀이 챔피언스리그에서 ‘이스탄불의 기적’을 일으키는 순간에도 이적에 의한 규정 탓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두 시즌 뒤 2006년 여름 발렌시아로 이적한 모리엔테스는 다비드 비야를 만나 좋은 호흡을 자랑하면서 24경기에서 12골을 기록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7골을 기록해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됐다. 발렌시아에서의 2년차였던 07-08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 우승도 맛봤다.

09-10시즌 자유계약으로 리그앙 마르세유에 이적했지만 거의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이듬해 8월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이후 지난해까지 우라칸 발렌시아 유소년 팀 감독, 레알마드리드 후베닐 B팀 감독, 푸엔라브라다 감독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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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마켈렐레는 레알마드리드의 흐트러진 공수밸런스를 잡아준 주축 선수였다. 첼시에서도 레전드로 꼽힌다. [사진=UEFA 홈페이지]


클로드 마켈렐레 - 세 개의 심장, 캉테의 분신

두 번째 주인공은 프랑스 출신의 미드필더 클로드 마켈렐레다. 마켈렐레는 엄청난 활동량과 수준 높은 태클, 센터백에 버금가는 대인 마킹능력을 갖춘 수비형 미드필더로, 이 포지션에서 역대급 레전드로 꼽힌다. 수비 능력이 뛰어났지만 168cm라는 불리한 신체조건으로 플레이에 여러 제약이 따랐다. 그는 단점을 활동량으로 커버했고 특유의 체력으로 ‘철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1년 스타드 브레스트에 입단해 다음 시즌 리그앙 낭트로 이적했다. 94-95시즌에는 크리스티앙 카랑뵈와 발을 맞춰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마르세유, 셀타비고를 거쳐 2000년 레알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게 됐다. 공격에 크게 집중된 팀컬러를 수비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해소했고, 레알마드리드는 화려한 공격진과 그 속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마켈렐레의 활약으로 00-01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 02-03시즌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레알마드리드는 베컴의 영입 후 마켈렐레에 관심을 쏟지 않았다. 결국 마켈렐레는 2003년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첼시로 이적했고, 레알마드리드는 공격으로 쏠린 밸런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점차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마켈렐레는 첼시에서 두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 2004년 주제 무리뉴 감독 부임 후 첼시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장했고 맹활약을 펼쳤다. 그는 첼시에서 프랭크 램파드, 마이클 에시엔과 함께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미드필드진을 구성했고 첼시는 탄탄한 조직력으로 큰 인상을 남겼다. 그는 첼시에서 두 번의 리그, 리그컵 우승, 커뮤니티 실드와 FA컵 1회 우승을 경험했다.

클럽에서는 준수한 커리어를 남겼지만 대표 팀에서는 주로 벤치를 지켰다. 프랑스에는 마켈렐레 외에도 뛰어난 선수가 많았고 1995년 첫 발탁 후 유로 2004부터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은퇴와 복귀를 번복하던 중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참가했다. 당시 지단, 비에이라 등과 호흡을 맞추면서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고, 마켈렐레는 유로 2008 조별리그를 끝으로 프랑스 국가대표 팀에서 물러났다.

07-08시즌 후 마켈렐레는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국 프랑스로 돌아갔고 PSG에서 세 시즌을 활동한 뒤 은퇴했다. 이후 PSG 코치, 바스티아 감독, AS모나코 기술 고문을 지냈고 가장 최근인 올해 1월 스완지시티의 코치로 선임돼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사진_이에로>
페르난도 이에로 - 레알마드리드의 상징인 ‘수트라이커’

마지막 선수는 라울 곤잘레스에 앞서 레알마드리드와 스페인 대표 팀의 주장을 맡았던 페르난도 이에로다. 9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로, 미드필더와 센터백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 1987년 레알바야돌리드에서 데뷔해 곧바로 주전으로 도약한 그는 신인이었음에도 29경기에 나섰고 약팀이었던 팀을 10위 이내로 끌어올렸다. 마침내 레알마드리드의 러브콜을 받은 이에로는 89-90시즌부터 블랑코스의 일원이 된다.

이에로는 레알마드리드에 입단하면서 세계적인 리베로이자 수비형 미드필더로 발돋움했다. 빌드업 능력은 물론 숨겨져 있던 공격본능까지 폭발하면서 레알마드리드에서 첫 시즌 37경기에 나서 7골을 터트렸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자주 득점을 기록했고 프리킥과 페널티킥 전담 키커로도 활약했다. 91-92시즌에는 수비수로 출전했지만 21골을 터트리면서 득점력을 뽐냈고, 세 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공수 모두에서 완벽한 선수였다. 그가 레알마드리드에 몸담았던 14시즌 동안 팀은 라리가 5회, 수페르코파 에스파냐 4회, 챔피언스리그 3회, 인터컨티넨탈컵 2회 우승 등 수많은 트로피를 수집했다. 개인적으로도 피파 월드 베스트11에 3회나 선정되는 등 레알마드리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선수였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는 주장 완장을 맡아 팀의 심장이 됐다.

1989년 대표 팀 데뷔와 동시에 무적함대의 캡틴이 된 이에로는 2002년 은퇴할 때까지 완장과 함께였다. 대표 팀에서도 역시 주 포지션은 센터백이었지만 A매치 89경기에서 29골을 터트렸다. 스페인에서 이에로보다 많은 득점을 기록한 선수는 뛰어난 공격수로 꼽히는 다비드 비야, 라울 곤잘레스, 페르난도 토레스뿐이다. 이에로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시작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총 4번의 월드컵에 참가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에로와 한국 사이의 인연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홍명보의 중거리 슈팅이 이에로의 발을 맞고 들어가면서 2-1로 쫓기게 됐고, 경기 종료 직전 서정원의 극장골이 터지면서 스페인은 2-2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한국과 8강에서 만났고 이운재의 선방으로 슈팅 시도가 무산됐다. 결국 스페인은 대회를 8강에서 마감했고, 이에로는 이 대회를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대표 팀 은퇴 후 소속팀에 헌신하려던 그의 꿈은 무산됐다. 주장이자 팀의 상징이었지만 많은 나이와 낮은 스타성으로 인해 02-03시즌 출전 시간이 줄어들었다. 갈락티코스 정책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이에로는 쫓겨나듯 중동의 알 라얀으로 떠났다. 이별은 아름답지 못했다. 레알마드리드에서만 총 668경기를 뛴 레전드에 대한 예우는 전혀 없었고 페레스 회장은 팬들의 원성을 샀다.

알 라얀과 잉글랜드 볼턴에서 각각 한 시즌을 소화한 이에로는 2005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11-12시즌 말라가 단장을 지냈고, 14-15시즌에는 레알마드리드 코치로 활동했다. 이번 시즌부터 스페인 2부 리그인 세군다 디비시온 레알오비에도의 지휘봉을 잡고 있다.

시대를 잘못 탄 비극의 주인공, 갈락티코 1기의 피해자 3인방 대해서는 ‘축덕들이 만드는 팟캐스트 해축야화 48화’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해축야화는 매주 금요일에 1부가, 토요일에 2부가 업로드 되며, 팟캐스트 어플 ‘팟빵’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레전드 오브 풋볼은 축구 팟캐스트 ‘해축야화’의 한 코너입니다. 아래 URL을 클릭하면 바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069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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